기다림과 회복의 시간에 조용히 그리고 살며시 건네는 시.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우리는 늘 조용히 셈을 하곤 하지요.
이루어진 것보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고, 기대했던 장면 대신 낭패와 후회의 얼굴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기도 하고요.
애써 괜찮은 척해도 마음 어딘가엔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이 남기도하고.
그 질문은 해가 바뀐다고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요.
이정록 시인의 「그믐달」을 이 시점에 다시 읽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가로등 밑에서 자란 들깨가 쭉정이가 되었다는 시의 첫 구절은, 쉼 없이 달려왔으나 기대만큼 여물지 못한 올 한 해와 닮아 있습니다.
쉴 틈이 없어서 쭉정이가 되었다니요...
그믐달
- 이정록
가로등 밑 들깨는
올해도 쭉정이란다.
쉴 틈이 없었던 거지.
너도 곧 좋은 날이 올 거여.
지나고 봐라. 사람도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그믐 없었던 보름달 없지.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어떤 세상이 맨날
보름달만 있겄냐?
몸만 성하면 쓴다.
--이정록, 『어머니학교』, 열림원, 2012
옛 친구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여'라는, 시 속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어미를 사용하는 고향말을 쓰곤 합니다.
정겨워서, 그리워서.
시 속의 화자는 훈계 대신 "너도 곧 좋은 날이 올 거여"라고 곁에서 위로를 건넵니다.
성장에는 어둠이 필요하고, 성숙에는 멈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줍니다.
이정록(1964~ ) 시인과 시인의 어머니가 함께 쓴 『어머니학교』에는 어머니 삶에서 묻어 나온 철학과 교훈이 깃든, 삶의 지혜와 해학이 넘치는 시들이 친근하고 생생하게 우리에게 말을 전합니다. 따뜻하고 다정한 시들에 대해 아들인 이정록 시인은 시 한 편 한 편이 어깨를 보듬는, 어깨를 기대는, '어깨의 시학'이라고도 했다지요. 시인은 "어머니의 말씀만을 받아 적은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시'라고 불리기엔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삶의 지혜와 철학이 온전히 담겨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보름달과 그믐달의 대비는 시의 사유를 한층 깊게 만들고 있지요. 보름이 있으려면 그믐이 있어야 하고, 그믐이 없었다면 볼음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은 삶의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보름달 같은 순간만을 성공과 행복이라 부르지만, 시는 그 뒤편의 그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어둠은 실패나 끝이 아니라, 다음 빛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라는 구절은 이 시의 중심을 이루는 문장입니다. 단정하지만 강요하지 않는 이 말은, 지금 어둠 속에 있는 이에게 조용한 숨구멍을 내어줍니다. 세상에 맨날 보름달만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은,
불완전한 오늘을 있는 그대로 견디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밝지 않아도 괜찮고, 잠시 여물지 못해도 괜찮다는 허락처럼 다가옵니다.
마지막의 “몸만 성하면 쓴다”라는 말은 한 해를 돌아보는 지금 눈물이 나도록 위로가 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성하기만 하면 삶은 다시 쓰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믐은 슬픔이 아니라 다음 빛을 위한 침묵입니다.
차오르지 않는 밤은 없습니다.
이 시는 결국 우리에게 묻고 있군요.
지금의 어둠을 너무 서둘러 몰아내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워야 할 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쉬지 못한 빛 아래에서 스스로를 말라가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