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울고 있는가

by 윤재


강렬한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


여성의 얼굴은 분해되고 조각났습니다.

관객은 캔버스 속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의 고통을 읽습니다.

눈물은 날카로운 선과 각진 형태 속에서 부서집니다.




우는 여인 1937.png

파블로 피카소, <우는 여인, The Weeping Woman>, 1937,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 소장



<우는 여인, 1937>은 게르니카 폭격에 대한 항의의 의미를 포함하면서 스페인 내전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보편적인 고통의 이미지를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의 모델은 한때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연인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도라 마르(Dora Maar, 1907~1997)였습니다. 도라 마르는 사진작가이자 화가였고 지식인이었으며,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활동하던 당대의 독립적인 여성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고통을 상징으로 선택했고, 도라 마르의 얼굴은 그 상징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눈물은 개인의 슬픔을 넘어, 시대의 비극을 대신 말하는 이미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이 눈물은 누구의 것일까요?



피카소와 도라 마르의 관계는 예술적 교류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관계였습니다. 피카소는 이미 거장이었고, 도라 마르는 그의 세계로 들어온 연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감정을 자신의 예술 언어로 흡수했으며, 도라 마르는 실제 삶에서 점점 불안정해졌고, 그 불안과 고통은 화면 속에서 더욱 과장되고 파편화된 얼굴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요.



〈우는 여인〉에서 얼굴은 하나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눈, 코, 입은 제각각의 방향을 향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입체주의 기법이 아니라, 한 인간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분해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도라 마르를 ‘본다’기보다, 피카소가 그녀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 그림 속에서 그녀는 말하지 않고, 오직 울 뿐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피카소는 그녀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사실적으로, 어떤 작품에서는 온화하게, 또 다른 작품에서는 고통스럽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이에 대해 피카소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에게 그녀는 우는 여자였다. 나는 수년 동안 그녀를 고통에 찬 형태로 그려왔다. 그것은 가학성 때문도 아니었고, 즐거움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 강요되듯 떠오른 하나의 비전을 따랐을 뿐이다. 그것은 피상적인 현실이 아니라, 깊은 현실이었다… 도라는 나에게 언제나 우는 여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성은 고통을 감내하는 기계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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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파블로 피카소 홈 페이지 )



피카소와 헤어진 후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과 정신적 고통에 힘들어했고, 그들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도라

마르 자신, 예술가로서의 위치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대중의 관심은 그저 '피카소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에

초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문득 도라 마르의 생각이 궁금해졌습니다.

지금 그녀의 속 마음을 들을 수 있다면,

그녀는 혹시 이런 말을 하게 될까요?


"

물감 냄새가 아직 마르지 않은 캔버스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본다.

아니, 그가 본 나를 본다.

파블로 피카소, 당신의 눈에 나는 끝내 ‘우는 여자’였구나.


왜 하필 울음이었을까.
왜 나의 얼굴은 조각나고, 색은 날카롭게 갈라져야 했을까.
당신은 늘 말했지.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아. 아는 것을 그릴 뿐이야.”

그렇다면 묻고 싶다.

당신이 아는 나는, 눈물뿐이었나?


나는 사진을 찍던 여자였다.

세상을 프레임으로 가르고, 빛을 계산하던 사람.

당신이 전쟁의 공포를 찢어낸 게르니카를 그릴 때, 나는 옆에서 그 공포를 함께 목격했다.

거리의 불안, 사람들의 표정, 무너지는 인간성.

그렇다면 내 눈물은 개인의 연약함이 아니라, 시대의 무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왜 그 눈물은 내 이름으로만 남았을까.


당신의 변심은 조용히, 그러나 잔인하게 왔다. 색이 바뀌듯, 당신의 관심도 바뀌었다.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자, 나는 점점 선이 거칠어지고 형태가 뒤틀렸다. 사랑이 끝나갈 때, 당신의 붓은 더 집요해졌지. 마치 이별을 정당화하려는 듯, 나를 ‘고통 그 자체’로 고정시키면서.


나는 묻는다.
당신은 나를 울게 했고, 그 울음을 나의 본질로 만들었다. 그게 예술인가, 아니면 면죄부인가.



“여성은 고통을 감내하는 기계들이다.”라고
파블로, 당신이 말한 그 문장은 당신의 시대를 설명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나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고통을 견디는 능력과
고통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다르다.
당신은 그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아니,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겠지.


사람들은 말한다. “그 그림은 강렬하다.” “비극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여자는 왜 울고 있는지, 왜 웃을 수 없었는지, 왜 울음 말고 다른 얼굴은 허락되지 않았는지.


나는 당신의 그림 속에서 영원히 운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안다.

울음은 하나의 상태일 뿐, 정체성은 아니다.

당신은 나를 박제했다.

큐비즘의 파편 속에, 사랑이 식은 남자의 시선 속에.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나는 여전히 질문한다.


혹시 당신은 나를 울리는 대신, 자신의 잔혹함을 그린 건 아니었을까.
그 찢어진 얼굴은 나의 것이 아니라, 사랑을 소유하려 했던 당신의 초상은 아니었을까.

이제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캔버스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는 묻는 여자가 된다. 의심하는 여자, 기억하는 여자.


그리고 말한다.

나는 울었지만, 울음이 나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지우기 위해 당신은 나를 그렇게 그렸겠지.



그리고 오늘날의 전시장 한가운데 선다.
흰 벽, 조용한 발걸음, 이어폰을 낀 사람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하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나를 올려다보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어 나를 저장한다.
“피카소의 연인.”
“비극적인 여자.”
단지 짧은 설명들이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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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web)





만약 당신이 끝내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가 너무 깊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시선이
끝내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끝내 울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나보다
당신들의 시선일지도 모른다고. "



도라 마르 1944.png

도라 마르, 1944 (사진 출처: 테이트 미술관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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