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뒷자락에 자리한 미개발 빌라 단지에 강원도에서 파친코를 크게 하는 사장님의 외아들이 할머니 집으로 유학 왔다. 그 아들을 소개받아 과외를 시작했는데 학생은 몸집이 몹시도 작았으나 보스처럼 ‘말보로 레드’를 수업 중에 아무렇지 않게 피워댔다. 심지어 수업 중간중간 재떨이를 비워주는 상대는 외할머니였다. 나는 고린내가 진동하는 담배 냄새를 장장 두 시간 동안 맡으며 미적분을 가르쳐야 했는데, 마음에 참을 인(忍) 글자가 주홍글씨처럼 박혔다.
함박눈이 내리는 주말 아침으로 기억한다. 겨울방학은 과외를 업으로 삼은 자에겐 농번기와도 같다. 나는 늘 끼니를 거른 채 과외를 다녔고 신경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 여차하면 작은 마찰에도 툭 하고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를 가르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가파른 오르막을 굽 높은 부츠를 신고 오르며 이상하게 불길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눈이 녹으며 빙판길로 변한 가파른 언덕길은 연탄재로 엉망이 된 상태였고, 하필이면 치마를 입고 부츠로 멋(주말이지 않던가)을 낸 터라 비탈길에서 엎어지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러다 직립보행이 불가능한 경사로 중간쯤에 다다랐을 무렵, 꽈당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경사로의 진입로까지 내려왔다. 하늘이 노래졌다. 무릎의 통증도, 자존심도, 치마가 들쳐진 수치심도, 다시 시작점에 도착했다는 허무함을 이겨내진 못했다. 부츠를 벗어던지고 맨발로라도 기어 올라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로도 경사로를 네 발로 올라가며 몇 번이나 철퍼덕 넘어지길 반복하였는지 모른다.
오랜 사투 끝에 빌라 현관문 앞에 도착한 나는 그.러.나 벨을 눌러보지도 못하고 가파른 비탈길을 다시 내려왔다. 빌라 현관문 앞, 파친코를 크게 하는 사장님의 외아들이 휘갈겨 쓴 메모가 노란색 포스트잇에 생기발랄하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 저 오늘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과외 못 할 것 같습니다.
툭하면 과외 시간을 바꿔대서 앞으로는 과외 시간 바꿔 달라는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연락은 하지 않고 포스트잇을 붙여놓는 방법을 선택하다니. 이 기가 찬 상황을 끝으로 나는 모든 과외를 내팽개치다시피 접어 버렸다. 열일곱 명에 달하는 학생에게 유학 가야(그럴 리가) 해서 남은 회차까지만 수업한다고 통보했다. 그 후 한동안 강남 근처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내가 버는 돈이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얇은 실로 기워 만든 옷 같았다. 적은 시간을 투자하는 데 비해 많은 돈을 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통장의 돈이 쌓이는 만큼 감각은 무뎌졌다. 설상가상 운이 좋게 타고난 강남 애들이 미웠다. 리코더나 이단 뛰기 등의 실기시험도 대학생을 불러 과외받는 학생에 무서운 질투가 솟았다. 시행착오 없는 그들의 삶에 패배감도 들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이 ‘짓’을 그만둘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고 또 찾았는데 노란색 포스트잇이 그럴듯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겨울에서 봄을 지나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자발적 백수가 된 나는 몇 개월을 늘어지게 잠만 잤다. 그러다 허기가 지면 침대에서 일어나 불러낼 친구를 찾았다. 그날도 저녁 식사로 삼겹살에 소주 어떠냐며 동네 친구를 호출했다. 친구는 갑자기 내가 곧잘 만들어주곤 하던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 졸업 후 취업한 친구 중 가장 많은 돈을 벌던 내가 한순간에 모두 때려치우고 백수가 되었으니 “힘들지?”라는 위로를 건성으로라도 건넸을 거다. 그리고 난 버리지 못한 습관대로 세상에서 제일 가련한 여자가 된 듯 구구절절 불편하고 힘들었던 상황들만 나열했을 거다. 그러다 차라리 땀 흘려 돈 버는 사람이 부럽다는 말을 한 것도 같다. 술김에 오간 대화니 각설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대형 식자재마트에서 샌드위치 재료를 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나는 길거리에서 샌드위치를 파는 젊은 싸장님이 되었다.
새벽 4시 기상. 샌드위치 속 재료 준비로 하루를 시작한다.
달걀과 감자를 삶고 으깨주세요. 한 김 식고 나면 위생 장갑을 끼고 손으로 조물조물 으깨면 금세 완성되지요. 이때 왠수 같은 바깥양반 얼굴이라 생각하면 속이 다 후련해져요. 마요네즈와 맛소금 넣고 섞으며 중간중간 숟가락으로 퍼먹어보세요. 을매나 맛있게요!
어쩐지 식빵보다 속 재료 양이 적다 싶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
아직도 장사 준비가 한참 남았다. 참치 통조림을 거름망에 담아 기름을 걸러낸다. 잘게 다진 양파와 옥수수 콘, 마요네즈를 넣고 뒤섞는다. 사과를 반으로 쪼갠 뒤 넓적하게 썬다. 식빵 위에 딸기잼을 바르고 치즈 한 장 올린다. 달걀과 감자를 버무린 속 재료를 넣은 샌드위치와 참치를 넣은 샌드위치. 종류는 두 가지다. 사과는 느끼한 맛을 잡아주고 아삭한 식감을 살리므로 한 조각씩 빠짐없이 넣는다. 썰어놓은 뒤 물에 담가 매운 기운을 제거한 양파 슬라이스는 참치 샌드위치에만 넣는다.
갑작스레 시작한 노점 장사는 집 근처 전철역 앞에서였다. 첫날이라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준비했으나 고작 샌드위치 열다섯 개 정도가 전부였다. 가격 책정부터 잔돈, 포장 비닐 등등 챙겨야 할 것을 다 제치고 무슨 배짱인지 바로 전철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6시에 전철역 앞에 좌판을 열었다. 정확히 얼마에 팔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1600원~1800원 선에서 정했던 것 같다. (무려 2003년도의 일이다.) 당시 김밥 한 줄을 천 원에 파는 전철 앞 1인 자영업(?)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라 그 가격보다는 높고 2000원보다는 적게 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점을 시작한 전철역은 바로 앞에 구청이 있어 출근길 공무원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격이 얼마인지 붙여놓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홍보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손님들이 먼저 다가와 얼마인지 물어볼 리 없었다.
“샌드위치가 1600원입니다. 달걀 샌드위치, 참치 샌드위치 골라보세요.”
모기 만한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행인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고개는 바닥을 향했다.
“샌드위치 두 개만 주세요.”
첫 손님은 술자리에서 내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는 말을 꺼낸 친구 녀석이었다. 자신이 한 말에 바로 마트로 달려가 샌드위치 재료를 담는 나를 차마 말리지는 못했으나 아침 일찍 일부러 출근길을 우회하여 내게 와준 것이었다. 첫 손님을 맞이하고 나서야 샌드위치를 담아 줄 비닐봉지도 거스름돈도 미처 준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친구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샌드위치 두 개 가격을 준비해 왔다며 내게 동전한 움큼 건넸다. 급한 대로 슈퍼마켓에서 검정 비닐봉지 몇 장을 얻어왔다. 친구가 아니었다면 개시는커녕 그대로 싸 들고 와 몇 날 며칠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샌드위치를 사 간 후,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만든 샌드위치 1600원.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서두르세요.”
몇 개 만들지도 않았으니 뭐 거짓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 후 가방을 둘러맨 중년 남자가 샌드위치를 두 개 샀다.
“학생인 거 같은데 오늘 처음 나온 거?”
“네, 오늘 처음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맛있으면 다음에도 또 들러주세요.”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유동인구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샌드위치가 몇 개 남지 않았을 즈음 한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두르고 다가왔다.
“지금 여기서 샌드위치 장사해도 된다고 누가 그래?”
아침 출근길 토스트 장사하는 아주머니셨다. 샌드위치 좌판을 벌인 출입구 옆으로 토스트를 파는 포장마차 세 개가 줄지어 영업하고 있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매대에는 아직 팔지 못한 샌드위치 두세 개가 남아 있었다. 나는 서둘러 샌드위치를 담고 영업을 종료했다. ‘내일부터는 이 출입구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샌드위치 장사는 스무날을 넘기지 못했다. 첫날 토스트 가게야 그렇다 쳐도 몇 블록 떨어진 대형 빵 가게에서도 견제가 들어왔다. 전철역 안의 떡집 사장님은 공익요원에게 신고하는 통에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전철역 입구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좌판을 깔았을 땐 장마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샌드위치 장사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끝이 났다.
새벽에 일어나 일명 ‘구루마’로 부르곤 하던 손수레에 샌드위치를 담은 상자를 싣고 나면 언제 일어나셨는지 아버지는 먼저 신발을 신고 앞서가셨다. 그만두시라는 만류에도 아버지는 항상 앞서서 구루마를 끄셨는데 전철역 앞에 다다라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셨다. 아니 그렇게 가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나를 지켜보셨다. 아버지 눈에는 딸의 모습이 ‘추락’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이문열의 소설 제목처럼 날개가 있는 나는 추락이 아니라 활강 곡예를 펼치는 중이라 말하고 싶었다. 잠시 낮게 날며 동태를 살피는 거라고. 곧 도움닫기를 한 뒤 높이 오를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와는 대화 한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아버지는 구루마를 끌 때 나는 덜덜거리는 소리가 당신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았을 거다.
내가 당시에 만들었던 샌드위치가 딱 요런 맛이었다.
투썸 에그 샌드위치.
요즘 샌드위치 가격은 정말 사악하다.
2003년도 추억의 샌드위치 가격 네 배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