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가 읽기를 위해 태어난 것일까, 읽기가 쓰기를 위해 태어난 것일까.
나의 경우, 읽기에는 그저 온전히 '읽기를 위한 읽기'와 '쓰기를 위한 읽기'가 있다. 하지만 쓰기는 읽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쓰기 위한 읽기 역시, 읽기 위한 쓰기를 위한 읽기라는 점에서 결국엔 읽기를 위한 것이리라.
처음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 그걸 글이라고 명명했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우습다. 마치 꼭 해야 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또 그 말을 꼭 들려줘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토해내듯 나는 쓰기를 시작했다.
누군가를 꼬집고, 잘못을 고발하고,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 썼다. 그때 쓰기는 내게 고함 항아리 같은 것. 쓰기라는 행위, 그 무성의 고함을 내지르고 나면 찾아드는 희열에 두근거려 잠을 설치기도 했다. 발설에 가까운 쓰기는 그것이 나만 읽을 수 있는 일기장에 쓰인 것이라고 해도 상당한 해방감을 주곤 했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쓴 것들을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런 쓰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읽고 싶은 것을 쓰고 싶기 때문에.
왜 나는 지금의 나밖에 되지 못했는지 장황하게 늘어놓은 변명과, 솔직함을 가장한 뾰족한 단어들의 나열, 어찌할 줄 모르는 외로움이 덕지덕지 묻은 비명을 읽고 싶지 않다.
읽고 싶지 않으니 쓰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