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에 ‘엄마’라는 말이 넘쳐납니다. 아이들이 저를 부르는 말들입니다. 그 단어를 눈으로 보며, 단 한 분을 떠올립니다. 살아온 날들 동안 늘 그러했듯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 동안에도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어김없이, 내 어머니, 당신을 떠올릴 것입니다.
어머니는 몸이 그리 강하지도, 목소리가 그리 높지도, 말씀이 그리 많지도 않은 분이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개인적 욕망과 만족을 표현하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바람을 표현하고 내가 그것을 충족해 드린 일이 많았다면 조금은 마음이 덜 아프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냥 그렇게 하나의 안온한 둥지가 되어 주셨고, 세상의 많은 걱정과 비바람을 막아 주는 울타리가 되어 우리들의 유년시절을 굳게 견디고 지탱해 주셨습니다. 사실 유년시절만이 아닐 겁니다. 태어남과 죽음, 삶의 그 많은 골짜기들에서 한 손길도 미치지 않은 곳 없이, 돌봄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하는, 그 따뜻한 손을 놓아드려야 하는 이 골짜기가, 너무 사무치게 아파서, ‘그렇지만’이나 ‘그럼에도’로 이어지는 다음의 구절을 한없이 미루고만 싶어집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남은 삶이 실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고, 막막하고 두렵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떠올리면 보드랍고 따스하고 편안했던 어머니. 그 안에서 우리들은 이렇게나 용감하고 씩씩할 수 있었습니다. 철부지일 수 있었고, 투정쟁이일 수 있었고, 게으를 수 있었고, 나른하고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벽이 되어 세상의 거침과 바람을 막아주셨기에 우리들은 이렇게나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었다는 걸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저의 개인적인 미망 속에서는, 받은 것이 너무 많지만 나는 그만큼 해드리지 못해 마음 아프고 슬픈 어머니지만, 그렇게 어머니를 좁은 굴에 가두는 것은 저의 속좁은 어리석음임을 알기에 이제 어머니를 본래의 ‘제 자리’로 돌려드려야 할 때입니다. 저에게는 너무 아픈 어머니지만, 사실 어머니는 그렇게 약하고 무력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견디고 단단하게 일구어낸 승리자셨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녀로서, 증조할머니와 고조할머니의 자랑스러운 손녀로서 책임감 있고 든든함을 주는 자식이었고, 대소사를 논의할 수 있는 큰누나였으며, 우리들에게는 늘 ‘가장’이셨습니다. 새벽잠을 언뜻 깼을 때 볼펜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다가 살짝 이마께를 짚던 엄마의 손이 떠오릅니다. 저는 엄마의 ‘새벽 걱정’이란 말로 부르던 장면이지만, 엄마의 새벽 걱정 덕분에, 마음껏 꿈꿀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힘이 더 센 것만 같은, 세상 끝까지라도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동네와 학교, 교당 등에서도 맡은 바 일은 충실하게 수행하시려 애쓰셨습니다. 지금은 안 계실지 모르는 많은 아짐과 아재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교도님들에게도 신의있고 충실한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굴곡 속에서도 어머니는 어떻게든 버티어 내며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수많은 슬픔과 아픔들은 밖으로 꺼내거나 전달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나 말이 없는 사람, 감정이나 욕구가 생생하지 않은 사람이었겠지요. 꾹꾹 누르고 참는 게 인격의 일부가 되어 통찰하고 조망하며 사려 깊은 충고와 도움을 주시면서도, 어머니 당신의 호소나 엄살, 요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밤 꿈은 혼잡하고, 많이도 흐느끼시면서도, 어머니는 우리 앞에서 울지 않으셨습니다. 늘 고요하고 안온한 집이 되어주셨습니다. 인생의 성공이란 게 무엇일까. 굴곡 없이 복된 삶이 그것이라면 어머니의 삶은 아픔이지만, 혹시 그것이 상처가 가득한 누더기 코트를 입고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꿋꿋함이라면, 어머니는 누구보다 큰 사람이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내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혼잡한 꿈을 헤매며 고통스러워하실 때, 엄마가 아픈 꿈에서 어서 깨어나길 바라며 그저 어머니의 손을 잡아드릴 수 밖에 없었던 어린 저는, 이렇게나 자라서도 어머니를 보살피지 못한 것이 너무 마음 아파 앞으로도 많이 울어야겠지만, 말년에 어머니가 보여주신 너그러움으로 많은 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아픔을 절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반야심경>의 소리는 들리기 시작하는 거다. 지금 우리 아픔은 너무 크지만, 내 개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어머니, 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께 받은 이 많은 사랑과 인과를 사는 동안, 두고두고 충실히 갚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