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서는 문득 이제는 승미아줌마와 친하다고 말하긴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오늘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스치는 것이 아줌마임을 얼마쯤은 알았으나, 자신도 모르게 급히 핸드폰을 찾았다. 아줌마 뒤를 따라 작고 왜소한 아저씨가 수줍은 얼굴로 인사했지만, 경서는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남자 친구와 등산 다녀오는, 아줌마의 얼굴은 아마 빛나고 있었을 거다. 미처 얼굴을 보지 못했어도, 아줌마가 행복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행복해진 아줌마를 어느 순간부터 경서가 피하고 있다는 거다. 인생을 다시 사는 듯 생기 넘치는 모습에, 왠지 마음이 불편하고 꺼림칙해지는 건 그녀의 장애인 딸 때문이다.
경서는 몇 년 전 아줌마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를 떠올린다. 이미 안면이 생긴 아줌마를 그날도 엘리베이터서 만났다. 그런데 그날 아줌마는 기이하게 보일 정도로 깡마른 모습의, 한 눈에도 정상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딸아이를 대동한 채였다. 청소년 복장이었으나, 낮은 지적 기능으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던 여자아이의 얼굴은, 가엾게도 아줌마보다 더 늙어 있었다. 딸을 공개하는 상황이 부끄러운 듯, 슬픈 듯 복잡해 보이는 아줌마의 미간에도, 순간 곤혹스런 주름이 생겨났다. 특징적인 딸 아이의 외모에 충격과 놀람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아줌마였기에, 스스럼없이 딸아이에게 인사하고 예쁨을 표현하는 경서와는 각별한 친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갑게 딸아이의 상태나 컨디션을 말해주기도 하고, 오늘은 무슨 일로 다투어서 기분이 안 좋다는 말도 전해 주었다. 평소 장애인의 인권 문제에 관심과 애정을 갖던 경서는, 코로나 시절, 자폐인 아들을 데리고 저수지에 빠져 죽은 장애인 어머니의 사연 등 재난이 왜 가장 약하고 아픈 고리를 잠식하는지 가슴 아팠다.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풍경의 가치를 모르고, 장애인 학교를 혐오시설이라며 유치 거부 데모를 하는 지역 이기주의를 참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경서였으나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는 아줌마에게는, 점점 이상한 불편함이 찾아들었다. 딸아이와 함께이지 않을 때 밝게 웃는 아줌마를 보면, ‘웃음이 나오나?’, ‘혹시 딸을 짐스럽게 느끼나?’, ‘애가 왜 저리 말랐나?’, ‘주말에도 센터에 보내나?’ 자신도 모르게 평가와 판단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공동주택 출입문 앞에 엠뷸런스가 오가고, 얼마 후 엘리베이터에서 시선을 피하며 “응, 갔어.”라는 아줌마의 말을 듣게 되었다. 미처 위로를 전하지도 못한 사이, 발길을 돌렸던 아줌마는, 딸을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남자를 들이기 시작했고 행복해졌다.
경서는, 오늘도 심리치료 방송을 보러 TV 앞에 앉았다. 전문가인 치료자의 마지막 코멘트는 경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더구나 당신의 잘못은 결코 아닙니다. 장애 아이를 출산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이유나 원인 때문이 아닙니다. 인류의 일정 비율로, 계속 태어나는 자폐인의 부모가 되는 것은, 우리들 중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그래서 우리 모두 함께 돌보아야 합니다.” 경서가 운다. 저 한마디가 주인공을 구원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평생 짐을 진 채 사는 ‘저 사람들’에게 자신도 언젠가는 위로의 손을 내밀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