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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원 Feb 21. 2023

늙은 장래희망은 처치곤란!




  내 첫 장래희망은 영어 선생님이었다. 네 살에 한글 독학을 했다는 사실은 부모님에게 "우리 애가 설마?" 하는 환상을 주었고, 그 환상과 기대의 결과는 내 언어 욕심이었다. 기대에 부응해야지. apple로 시작하는 영어단어 포스터를 읽는 걸 좋아했다. 정작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애플을 어떻게 쓰는지 까먹었다. 애플을 어떻게 쓰는지 뭐가 중요해, 나처럼 과일 잘 챙겨 먹는 애가 어디 있다고. 건강하면 됐지, 암.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동시 쓰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가 쓴 시가 썩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어. 시로 대박 나는 꼴을 세상에 보여주고야 말지. 나는 말 그대로 내 시에 뻑이 가서 계속 내 시를 읽었다. 새싹에 대한 시였는데 그걸 왜 그리 좋아했을까. 아마도, 그림은 못 그리고 춤은 못 춰도 한글은 아니까 그랬던 것 같다. 네 살에 한글을 독학한 나는, 꽤 오래전부터 한글에 매여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말했듯 그림은 영 못 그리고, 춤도 못 추고, 노래는 꽤 잘 부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쭐댈 정도는 아니었는지 부모님은 나와 노래방에 갔을 때 조용필의 '모나리자'를 불러보라고 했다. 모르는 노래를 어떻게 불러요,라는 이의제기도 안 하고 자존심에 노래를 부르려던 나는 당연히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그때 아빠가 멋지게 마이크를 잡고, 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나, 하네. 부모님의 장난에 나는 노래는 못 부른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그림은 영 못 그리고, 춤도 못 추고, 노래는 좋아만 하고, 그럼에도 나에게는 표현할 방법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때 성적은 대부분 90점 이상이었는데 가끔 80점 대가, 자주 100점이 나왔다. 아는 문제를 틀려 100점을 받지 못하면 안타깝고 분했다. 결과는 점수이니 나는 100점이야,라고 정신승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점수를 매길 수 없는 글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공부를 포함해 재능이 많은 아이였음에도 평가가 두려웠다. 오디션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 참가자처럼 자신에게 맞지 않는 평가를 받으면 화를 내고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않는다. 글도 쓰지 않는다. 그 당시에 나는 글을 쓰지 않고, 시인이 되겠다고만 말하고 다녔다. 학교에서 적는 장래희망칸에는 시인이라고 적었고 '자신을 표현하는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도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챙겼다.


  초등학교 고학년에는 장래희망이 자연스럽게 소설가로 바뀌었다. 솔직히 시는 재미없어져서 그랬다. 나는 주마다 도서관에 가서 소설책을 두 권씩 빌렸다. 쉬는 시간에도, 자습시간에도, 시험이 끝난 후 영화를 보는 시간에도 소설책을 읽었다. 청소년 소설을 쓰는 팀 보울러의 리버보이와 스타시커를 읽고, 그 당시 번역 된 그의 모든 책을 읽었다. 팀 보울러의 소설은 환상적인 존재나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단편적으로 그 모호한 표현들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도서관에 비치되지 않은 책은 엄마에게 사 달라고 했고 엄마는 책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돈을 썼다. 내가 어떤 아들인가, 엄마가 라면값이 올랐다며 한숨을 쉬는 것을 포착, 밥을 먹고 또 라면을 먹으려는 가족들에게 라면이 비싸니 먹지 말라고 한참을 소리치던 아들 아닌가. (진상 가족)  그런 내가 유독 책 구매에는 부모님의 경제 사정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효도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책 읽는 아들이 어디 있어.

  초등학교 5학년 수업 중에는 무용 수업이 있었다. 나는 춤을 제대로 추지 않았지만 늘 무용 수업에 스토리를 넣어 아이들을 웃겼다. 선생님은 칭찬을 하면서도 무용을 제대로 넣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글은 쓰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비슷했다. 뮤지컬부 제의를 위해 나를 찾은 선생님은 쉬는 시간에 책만 읽고 있는 나를 보며 미친놈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생이 학생한테 미친놈이라뇨. 꿈이 없는 친구들은 내 꿈이 확고하다며 부러워했다. 나는 말 그대로 확고한 꿈이 있다고 믿었기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너도 나도 꿈이 있는 게 미덕인 세상이었다.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책을 읽다가 주의를 받았다. 자는 것도, 떠드는 것도 용인되지만 책을 읽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지금 같았으면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대응했을 거라는 찌질한 상상은 이 글에 펼치지 않겠다. 그즈음에 자퇴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나의 첫 글은 엽편 분량의 소설이었다. 인정받지 못함과 자퇴를 비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수작이라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었는데. 그 글을 주변 어른들에게 막 뿌렸었다. 내가 진짜 잘 쓴 줄 알고. 물론 지금 생각해서는 그분들이 그 소설을 읽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퇴를 한 후 서울로 올라왔고 인터넷을 통해 문예창작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선생님을 구했다. 꼼꼼하게 여러 사람을 만나보며 객관적으로 선생님을 찾아야 했지만, 나는 처음 만난 그 선생님께 바로 수업을 받기로 했다. 인복이 많은 나를 과신해서였고, 나는 역시 인복이 많았다. 수업을 듣고, 토요일에는 학교 밖 청소년을 대상으로 책을 만드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글을 썼다.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한 친구들과 책을 교환하고, 부모님께 한 권,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한 권, 친한 선생님께 한 권. 나머지는 내가 가졌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 아, 나는 적어도 10년은 걸리겠구나. R=VD라는 공식을 믿지 않는 염세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길을 어떻게든 걸어가고 있다. 쉬엄쉬엄 기어가고 있지만. 너무 멀리 와버려서 다른 길로 가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저 이 길로 오겠다고 말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렇다. 7살에 가졌던 영어 선생님이라는 꿈은 진작 버렸는데.


  아아, 내 성적표를 받기 싫어.

  그렇다고 되돌아가기도 쪽팔려.

  지금보다 더 노력하기도 싫어.

  그래도 뭐라도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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