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arephath Oct 29. 2024

나는 아나키스트 이다.

내게는 그 사람 뿐이었다. 내 주인. 내가 온전히 의지하는 한 남자. 내 운명을 맡길 단 한 사람.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 하고픈 사랑.

그 사람은 큰 산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가슴에는 세상이 있었고 인민이 있었고 이루고픈 이상이 가득했다. 나 하나만을 사랑하기에는 그 가슴이 너무 넓은 사람. 그와 나는 일본의 동경대학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아나키스트라고 불리우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른다. 다만, 인민을 지배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싸우는 그런 사람 정도라는 것 밖에. 그 사람은 항상 바쁘고 진지했다.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음성이 좋았다. 연설할때의 그의 표정이 좋았다. 그의 몸짓과 외치고 내 뱉는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꿀과 같았다. 솔직히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그의 동지라고 부른다. 그의 사상이나 이념을 내가 깊이 이해하고 거기 동조하다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나는 그냥 그가 좋았다.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말에 동의했을 뿐이고 따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조선이 망하고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을때도 망하지 않은, 조선 어느 집안의 무남독녀였다. 항상 먹을 양식이 넉넉했고 좋은 옷과 장신구를 두르고 다니는 그런 여자였다. 아버지는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에 민감한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 집이 망하는 일은 결코 없었고, 당신의 가정을 언제나 지켜내시는 훌륭한 아버지셨다. 지역에서는 항상 존경받고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분이셨다. 심지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조선의 많은 집안이 패가망신하고 강탈당할때도 아버지는 당신의 가정을 지켜내실만큼 유능하고 총명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앞으로의 세상에는 여성도 배워야 한다며 나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셨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 음대에서 바이얼린을 전공했다. 사상이나 이념 따위와 접할 일은 없는 전공이다. 그저 악기 하나만 잘 연주하면 되는 과에 다녔다. 그런 내가 어느날 교정을 지나치다 나의 운명을 만났다. 그는 그날도 캠퍼스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지배, 피지배, 무정부주의,,, 그런 말들을 했지만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한참을 연설하던 그가 잠시 연설을 멈추고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연설을 구경하고 돌아서서 걷는데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일면식도 없는 남정네가 여자인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그건 정말 무례하고 예의없는 짓이라 생각했다. 그는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법학부에 다니는 아무개인데, 학교에서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며 모임에 나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무슨 큰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무말 없이 돌아서 가던 길을 걸었다. 그는 계속 나를 따라 오며 말을 걸었다. 큰일났다 싶었다. 빨리 그 순간을 벗어나야 하겠기에 그의 초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다음날, 나는 여느 날 처럼 학교 수업을 들었고, 바이얼린을 연습했다. 그리고, 머리 속은 온통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제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만 해도 놀라고 당황하여 그렇게 헤어졌지만,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 생각만으로 초조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한참을 연습을 하고 있는데, 창문 밖에서 학생모를 눌러 쓴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였다. 내 얼굴은 화들짝 놀라 다시 붉게 달아 올랐지만 마음 한켠에선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길일까?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가 또 말을 걸어 왔다. 오늘 저녁에 자신의 조직에 모임이 있는데  같이 갈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같이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저녁 모임때 까지 나는 그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들을 해 주었다. 자기는 조선에서 매우 부유하고 권력 있는 대신의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되면서 아버지는 자결을 하셨고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일본에게 강탈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고 아나키스트 운동이라는 것에 투신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 학교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흥미로왔다. 그리고 이상했다. 우리 집도 부유한 집안이었는데 왜 우리 집은 계속 부유한데 저 사람 집은 망했을까? 왜 저 사람 아버지는 자결을 하셨을까? 그러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얘기하기 좋아하는 그의 말들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우리는 같이 저녁 모임에 참석했다. 돌아가면서 어떤 주제에 대해 발표를 하고 다 같이 토론을 하는 그런 형식이었다. 물론 모임을 이끄는 것은 그였다. 다른 사람의 얘기는 사실 별 관심도 없고, 내 마음과 귀는 온통 그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아무도 아무를 지배하지 않는 세상이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무정부주의, 협동조합, 농업에 기반한 자립경제,,, 등등의 말들을 했다. 나는,,, 그냥 무조건 그의 말에 동의가 되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아나키스트 모임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한번씩 나에게 모임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숨길 일이 있는 걸까? 분명 월요일 저녁에 정기적인 모임을 하는데, 한번씩 다른 요일에 긴급하게 모이기도 했다. 주로 그런 모임에는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인지 너무너무 궁금했지만, 그는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보이지 않았다. 항상 연습실로 나를 찾아와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를 항상 볼 수 있었고, 정기 모임에서는 그의 연설을 항상 들을 수 있었기에 그의 연락처 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새삼 깨달았다. 나는 불안했다. 도대체 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달 정도 후에 그가 연습실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울기부터 했다. 도대체 사람이 이러는게 어디 있냐고, 그에게 원망을 하며 펑펑 울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었는지 얘기해 주지 않던 그가, 계속 울고 있는 나를 보더니 결심을 한 듯 털어 놓았다. 그는 그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범죄자일까? 나는 범죄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일까?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사실, 그가 조직하고 운영하는 모임은 단순히 학문 토론만 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그들이 외치고 열띠게 토론하던 일들을 실행하는 집단이라고 했다. 그,,, 테러같은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인민을 지배하는 자들에게 테러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라는 집단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도 연대한다고 한다. 그는 사라지기 전, 어느 테러 활동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몸은 괜찮냐고, 다친 데는 없냐고 그제야 물어봤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건 누군가를 공격하건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매우 위험한 일을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고, 내 평생의 걱정과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 그 때 시작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다니고 쫓아 다니는 사람이 되었고, 경찰이나 정부에서 파악하기로는 핵심 운동원이 된 것 같았다. 한번씩 형사 같은 사람이 나를 미행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나 역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위험한 일에 연관되는 모임에는 그가 나를 일체 참석하지 못하게 했기에 감옥에 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를 보호했다. 나름의 방법으로.


어느날, 그는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그가 왜 조선에 가건, 가서 무엇을 하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그저 그와 헤어질 수가 없었다. 음대를 졸업하고 성공한 바이얼리니스트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는 조선으로 내가 돌아가는 것을 결단코 반대하셨다. 나는 음대는 조선에서도 다닐 수 있고 타향살이가 너무 고되다고 아버지께 읍소를 한 끝에 이화학당 음대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조선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절차는 아버지의 재력과 권력으로 가능했다. 그렇게 그와 나는 같이 조선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조선에 와서도 같은 일을 했다. 아나키스트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것을 조선에서 총괄하는 일을 했다. 당연히,,, 나도 그의 활동에 동참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아버지에게 인사를 시킬려고 했다. 그와 혼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는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이고 앞날이 유망한 청년이라고 말씀드렸다. 일단 아버지는 그와의 만남을 허락하셨고 우리는 마음껏 서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총독부에 취업을 했다. 그의 학력과 선발시험의 우수한 성적으로 가능했다. 그가 일본에서 경찰의 조사를 받은 일 등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총독부에 들어감으로써 그의 활동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고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기에 더욱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위험한 모임에는 일절 못오게 했던 그였지만, 나는 점점 모든 일에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금지했던 어느 모임에 때를 써서 참석했다. 과연, 그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일본의 고관대작들의 동태를 살피고 동선을 파악하다 테러하기 좋은 시점을 정해 테러를 명령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참석한 그 날 마침 조선 총독부에 부임하는 총독 보자관의 이동 경로에 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그를 사살할 날을 정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일의 옳고 그름 때문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가 직접 암살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위험해 빠지는 것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감히 그에게 그런 일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게 그의 일이었기 때문이고 그의 이상이었기 때문이고, 그는 그의 그런 활동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그는 총독 보자관이 열차에서 내리는 때 그를 암살할 것이다. 계획은 멀리서 저격을 하고 도주하는 것이었지만, 실패하건 성공하건 저격수는 위치가 파악이 될 것이 뻔했다. 그는 잡힐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서 그를 어떻게 다룰지 불을 보듣 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를 위험에서 구할 방법은 있을까?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는 어느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보자관을 사살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보자관을 죽이면, 내가 잡히고 그는 살 수 있다. 그 날이 왔다. 나는 총을 다룰 줄 모른다. 내가 언제 그런 걸 배울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칼을 한 자루 외투 속에 품었다.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호위병들이 있었지만, 연약한 여자인 나에게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누군가 내리는데, 주변의 반응과 경호병들의 태도를 봐서 그가 보자관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품고 있던 칼을 꺼내 그를 향해 힘껏 뛰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일본군의 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저격을 하지 못했다. 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일단 유치장에 갇혔다. 그가 면회를 왔다. 그가,,, 처음으로 울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냐고 나에게 원망했다. 온갖 고문으로 상해 있는 내 몸을 보는 그의 눈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웃었다. 괜찮다고,,,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다.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은 나는 면회도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힘이 없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기에 이 글을 쓰지만, 더 많이 쓰고 싶지만, 더 이상 글을 쓸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난 곧 죽을 것이다. 총독 보자관의 살인 미수범이니, 아마도 조속히 사형을 집행할 것 같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아나키즘이 뭔지 잘 모른다. 인민이 뭔지도,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지 않는 세상이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나는 아마 골수 아나키스트일 것이다. 내 사랑이, 그를 향한 내 사랑이 그렇게 불린다면 난 얼마든지 아나키스트가 되겠다. 안녕, 내 사랑. 부디 당신이 죽는 날까지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고통받지 않기를. 그리고, 당신의 이상과 신념이 당신의 삶 속에 자그마하게라도 실현되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