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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rephath Nov 03. 2024

어린 시절의 사랑, 그리고 불륜

아! 춥다. 몇년 만의 한파라는데, 사람 잡는 추위다. 지하철 역에서 직장까지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몸을 바싹 웅크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살찍 뛰려는데 그만 스텝이 꼬여 넘어져 버렸다. 이 추운 날씨에 넘어지니 더 아팠다. 그리고 쪽팔렸다. 젠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넘어진 내 옆을 종조걸음으로 지나가는데, 마주오는 방향에서 한 여자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 저건 뭐지? 도와 줄 거면 와서 도와 주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처럼 지나가던가, 왜 저렇게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까? 그러고 있는데 마침내 그 여자가 내게 다가온다. 나는 올려다 보았다. 여자는 계속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입을 연다. ‘너 철수 아니니?’ 응?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가만 보니, 고등학교때 잠깐 사귀던 애다. 은희. ‘아 은희구나. 오랫만이네.’ 그때까지 나는 계속 나는 넘어진 상태다. 누군지 알아봤으면 좀 일으켜 주던가. 그녀는 그제야 나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조심 좀 하지’라고 한다.


때는 1998년, 나는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 한참 사춘기를 지나는 남녀가 사귀었으니, 보통 뜨거운게 아니었다. 등하교를 같이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말을 함께하는 것도 기본이었다. 그리고서는 각자 다른 지역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로 소원해져 흐지부지 헤어지게 된 사이다. 끝이 흐지부지했기에, 이렇게 민망한 상황에서 만나는 게 더 곤혹스러웠다. ‘아직 시간이 좀 있는데, 우리 어디 가사 차나 한잔 할래?’그녀가 물어본다. ‘응 그러지’ 나는 근처 카페에 가서 모닝 메뉴와 함께 홍차를 시켰다. 그녀는 커피를 시킨다. ‘아침은 먹고 나왔나보네?’ 실없는 질문을 했다. ‘아니 아침 잘 안먹어’ 그래도 대답을 한다. 그렇게 어색하고 실속없는 대화들을 나눈 뒤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연락처 같은 건 서로 교환하지 않았다. 둘다, 다시 어떻게 해보겠단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잘가’‘응 반가웠어’

출근후 일하는 사이 나는 아침의 일을 거의 까먹었다.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애까지 있는 내가 철없던 사춘기 시절 사귀었던 여자애와 다시 우연히 만난게 뭐 그리 큰 일 이겠는가? 일과를 마무리 하고 퇴근을 하려는데, 어라? 그 여자애다. 그 여자애가 우리 회사 빌딩 문 앞에 서 있다. 설마 나를 기다리는 걸까? 아침에 차를 마실때 예의상 서로 어느 회사에 다니는 지는 알려 줬었는데, 괜히 알려줬나? 빌딩을 나서니 그녀가 내게 다가 온다. ‘안녕’‘응 안녕 왠 일이야?’‘왠 일이냐니, 좀 섭섭한데?’‘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왔어.’ 불길하다. 이 여자 왜 이러는 걸까? 이 여자는 가정이 없나? ’그래, 그러자, 저녁 같이 먹지 뭐.’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갔다. 초밥을 먹었다. ‘’너는 결혼 안했어? 집에 가서 저녁 준비 해야 하지 않아?’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 이혼했어’ ‘아 미안해. 내가 괜한 소릴 했구나.’ ‘미안했어, 나 이만 갈게’ 그녀는 그 시로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나는 쫓아갔다. ‘미안해. 그냥 별 뜻 없이 한 말이야. 정말 미안해.’‘내가 화난 건 네 태도야. 내가 너한테 불륜이라도 저지르자고 할 것 같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너무 방어적인거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를 대하는 내내 매우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미안했다. 그녀가 계속 말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일 하고 있는지, 그런거 궁금하지도 않아? 내가 반갑지도 않니 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됐어,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그게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날부터 나는 계속 그 일이 신경쓰였다. 그리고, 신경쓰였던 말큼, 그녀와 내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그녀와 나는 어느 레코드 가계에서 만났다. 당시 우리들의 마왕이었던 신해철의 넥스트 엘범을 사러 갔었다. 마침 그때 딱 한개가 남아 있었다. 나와 그녀는 그 엘범을 동시에 집었는데, 처음엔 서로 먼저 집었다고 싸웠다. 그러다 합의를 본 것이 반반씩 엘범 값을 부담하고 서로 일 주일씩 번갈아 가며 듣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에 복사를 해서 CD가 없는 주는 테이프를 듣는 걸로. 그건 그녀의 제안이었다. 꽤 괜찮은 제안 같았고 똑똑한 해결 방법인 것 같았다. 그러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레코드 가게에서 만나 CD와 테이프를 교환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남녀가 되었고, 처음엔 음반만 교환하다가 나중엔 떡볶이도 같이 먹고, 같이 영화도 보러 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 누구도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사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날, 서로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거의 매일 같이 등하교를 하고 거의 매일을 붙어 다녔다. 불같은 사랑이었다. 그러다, 서로 다른 지역의 대학에 가게 되었고, 원거리 연애라는데 그렇듯, 점점 힘들어 지더니 흐지부지 끝내고 말았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사귀자고 한 적도, 헤어지자고 한 적도 없었지만, 우리는 분명 사랑했고, 그리고 이별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를 그 오랜 세월을 넘어 만났는데, 아무리 상황이 쪽팔리는 상황이었다 해도 너무 뚱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상처받았을까? 나는 걱정되고 초조했다. 그 긴 세월을 넘어 만나 내가 그녀에게 준 것이 상처 밖에 없었다면, 그건 정말 슬픈일이고 나란 놈은 욕먹어도 싸다. 그날 이후 나는 온통 그런 생각들과 옛적의 추억들에 젖어 있었고, 기어코 내 감정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는 어느날 아침, 출근길에 그녀의 회사 앞에 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그녀가 다가온다. ‘아, 안녕, 자 잘 지냈니?’ 내가 내뱉고도 무슨 말인지 모를 인사말이다. 내랑 해어진 이후 잘 지냈냐는 건지 다시 만난 이후 오늘까지 잘 지냈냐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녀는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저녁에 만나. 내가 그리로 갈게’ 하고는 그대로 회사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심히 초라해진 심신을 부둥켜 안고 그녀를 만날 시간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녀와 만났다. ‘저녁 안 먹었지? 내가 살게’ 그리고는 먼저 걸어간다 나는 한 1m정도 뒤떨어져 그녀를 따라 갔다. 그리고 저녁을 먹었다. ‘나 너랑 헤어지고 많이 힘들었어. 그래서 여러번 연애도 했지. 그러다 적당한 남자랑 결혼도 했고, 그런데 결혼 생활이라는게 사랑 없이는 힘들더라고. 그래서 접었어.’ 그녀의 일목 요연한 요약이다. 아! 나는 나쁜 놈이다. 그냥, 그 때는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래서 ‘미안해, 내가 너를 불행하게 했구나.’라고 분수넘는 대답을 했다. ‘아니, 딱히 불행하거나 하지는 않았어. 결혼에 실패했은 뿐이지.’ 그녀와 나는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내가 말했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녀가 답했다.‘뭐? 날 더러 네 내연녀라도 해라는 거야 뭐야?’‘아냐, 절대 그런 뜻은 아냐. 그냥, 지금처럼 가끔 만나 안부나 묻고 식사나 하고…’‘농담이야 아저씨야. 놀라긴. 그래, 가끔 보자. 반가웠어,그리고 찾아와 줘서 고마웠고.’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가 우리의 관계를 절대 내연의 관계로 발전할 수는 없는 그저 친구 사이인 것으로 명확하게 정리해 줘서 고맙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개운치가 않았다. 그녀 생각이 나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뛴다. 그리고,,, 보고싶어진다. 아! 이러다 바람피게 되는 걸까?

나는 그녀를 자주 보러 갔다. 이거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고, 우리는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했다. 솔직히 말해, 데이트를 했다. 즐거웠다. 어릴적 추억에도 젖어 볼 수 있었고,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계속 만날 수만 있다면 계속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은 욕정의 동물이자 욕심꾸러기다. 더 이상 밥 먹고 영화보는 것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어는 날, 술을 같이 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 눈을 한동안 응시하더니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술을 같이 마셨다. 둘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다. 우리는 식당 옆 호텔로 갔다. 호텔 커피숍에 커피가 맛있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난 이미 방을 예약해 두었다. 커피를 마시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향했다. 그녀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을 우리는,,, 함께 보냈다. 내 팔배게를 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너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해? 그 레코드 가게.’‘물론 생각나지, 너랑 나랑 하나 남은 앨범 먼저 집었다고 싸우다가 일주일씩 번갈아 듣기로 했잖아?’‘응, 근게 그거 우연 아니냐.’‘응? 그게 무슨 말이야?’‘내가,,, 내가 너랑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네가 집은 앨범 집은 거였어. 나 신해철 별로 안좋아해.’ 아! 이럴 수가. 나는 처음부터 그녀의 사랑을 받고 있었단 말인가? 오로지 그녀의 의지에 의해 사랑했었단 말인가?‘ 그 얘길 듣고 나니 흐지부지 끝낸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끝내는 게 아니었다. 이별에도 예의가 있는 법인데, 난 너무 그녀를 무성의하게 대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미안해’라고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후로 우리는,,, 소위 내연 관계, 불륜이란 사이가 되었다.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나를 향한 큰 사랑의 의지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직, 아내는 모르는 것 같다. 앞으로 이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 지 모른다. 약간 그녀가 무섭기도 했지만, 난 어쩔 수 없이 내 감정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렇다. 나는 세상의 수많은 불륜남 중 하나가 되었고 그녀는 수많은 내연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관계가 있기라도 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잡고 싶었다. 차마 우리사랑 영원히 같은 말은 할 수가 없다. 다만, 흐지부지 끝낸 그 옛적 철없던 시절과는 달리 하루하루의 감정에 충실하며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그녀의 직장으로 갔는데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출근을 하지 않은 걸까? 어디가 아픈 걸까? 나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몇일을 더 찾아 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안네 데스크에 가서 모모 회사에 김은희라는 사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 돌아오는 충격적인 답은, 그녀가 전근갔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이게 얼마 만에 만난 관계인데 이렇게 아무렇제도 않게 무 자르듯 잘라낼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복잡한 상각으로 퇴근을 해서 집으로 왔다. 아내가 저녁을 차려 놓았다. 내 생각은 온통 그녀로 가득한 채 아내가 해 주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한참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내가 말한다.‘지방으로 전근간 친구가 있는데, 중요한 사람한테 얘기를 못하고 간다고 아쉬워 하더라고요. 거 왜 자기 회사랑도 가까운 모모상사 있잖아요. 그 회사 지방 사무실로 전근 가게 됐다나봐요. 중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라고 말하여 아내는 내 눈을 응시한다. 슬픔과 원망과 증오로 가득한 눈빛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 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제야 나는 알았다. 아내가 내 불륜 사실을 알게된 것과, 그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저 눈에서 눈물만 흘러내릴 뿐이었다. ‘어머, 여보 왜 그래요? 직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남자가 울기는.’하며 나를 달래는 아내는 내뱉는 말과는 달리 눈빛은 여전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사 자리를 떴다. 아내에게 들켰지만 아내가 참고 살아 주기로 한 불륜남의 앞으로의 인생은 가시방석이 될 것이다. 그녀는 떠났다. 젊은 시절 그렇게 예의 없는 이별을 한 데 이어 이번에는 이렇게 비참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너무 부끄럽고 면목없다. 그녀에게도, 아내에게도. 나는 앞으로 아마도 빈껍데기로 살아갈 것 같다. 아무 것고 사랑할 수 없는 빈껍데기로. 이것이 아내가, 그리고 그녀가 내게 주는 벌이라면 달게 받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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