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는 24시』中김초엽「글로버리의 봄」(자이언트북스,2021)을 읽고
김초엽. SF 소설로 주목받고 있는 젊은 소설가이다. 요즘 대세는 SF라는데.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 솔깃했는지도 모른다. 「글로버리의 봄」은 게임의 가상세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 ‘봄’과 ‘파틴’, ‘멜’은 모두 가상 속 인물이다. 여기서 본문이 흥미로웠던 것은 처음부터 그들의 등장을 가상이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마치 추리를 빙자한 사이보그처럼 말이다. 그래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단막극인데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 있다. 짧지만 허무하게 끝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긴 여운만이 남을 뿐이다.
영화 『프리가이』의 ‘NPC’, 테드 창의 소설 『숨』 중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의 디지언트, 그리고 글로버리라는 가상세계 속 인물 3인의 공통점은 게임 캐릭터라는데 있다. 사용자는 ‘무한한 용서’가 가능한 가상현실 게임에서 인간의 잔혹함을 무기 삼아 통제하고 명령하며 자신들의 욕망을 뿜어낸다.
어떤 경우에는 여행자들이 북적거리는 현장에서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행자들은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곧장 주위를 탐색하고,
용의자들을 지목한다.
바로 이 ‘라운드’가 나인 레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수사였다.
봄도 여러 번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다.
「글로버리의 봄」 P.23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묻지마 범죄 뉴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어느 곳이든 안전하지 않다. 범죄는 점점 잔인해지고 우리는 그것에 어느 순간 익숙해질지 모른다. 작가는 그 점을 정확히 꼬집었다. “굳이 단서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시체 구경을 즐기는 것 같은 여행자들도 많았다.”(「글로버리의 봄」) P.23 범죄의 현장을 즐기는 목격자라니. 상상할수록 무섭다. 하지만 더 소름 돋는 건 그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 닥치든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다만 무섭고 비열한 형태의 적응이 될까, 필자는 심히 염려스럽다. 현실에서 범죄자들의 상당수는 초범이라서 또는 심신 미약으로 감형을 받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도 큰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 이것을 게임이라는 세계에 빗대어 비판한 것은 작가의 상징적 비유가 탁월하다는 해석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이곳에는 현실 시간으로 몇 달 전 크루즈에 탑승한 반수면 상태의 승객들과, 이 세계에서 생성되어 크루즈를 나갈 수 없는 블록들뿐이거든요.”(「글로버리의 봄」) P.32 반수면 상태의 심신 미약 가해자, 크루즈를 벗어날 수 없는 이 사회의 잠재적 피해자.
그는 이곳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네의 흔들거림과 느린 원반의 회전 사이에 있는 수많은 웅성거림을.
허공을 가득 해운 목소리들을.
(..중략..)
이제 우리는 글로버리가 우리를 위한 곳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끔찍하게 따분한 방으로 서로를 숨긴다.
「글로버리의 봄」 P.36
끔찍한 현장에서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회가 더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쩌면 따분한 방으로 서로를 숨기면서 생기는 소통의 부재가 이런 비극적인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진정으로 꿈꾸는 「글로버리의 봄」은 마샤의 집에 봄을 찾아온 노인이 말했던 ‘순수한 즐거움과 파괴적이지 않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가상세계가 아니었을까. 캐릭터를 ‘봄’이라고 이름 붙인 작가의 의도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