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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양 Apr 21. 2022

비로소 고하는 피터팬과의 작별 (1)

외면하던 성숙과의 조우, 그리고 어른으로

흔히들 말하곤 한다. 아이는 어른을 꿈꾸고, 어른은 다시 아이를 꿈꾼다고. 어릴 적에 아이인 스스로를 참 좋아했던 날 떠올려보면, 이 통념이 적어도 나에겐 해당되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나를 한없이 보호해주는 안전한 틀 속에서 마냥 즐기며 사는 행복을 일찍이 깨달았으니. 오죽하면 자존심과 승부욕 빼면 시체던 꼬마가 수많은 친구들이 모인 졸업식에서 부끄러움 모르고 엉엉 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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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선 (바른 아이인 척 용쓰는) 반장 모범생, 밖에선 온 동네 산과 놀이터는 다 들쑤시는 골목대장으로 활동하던 나는 남이 보기엔 거칠 것 없고 두려움 없는 씩씩하고 당찬 아이였을지 모르겠다. -또 실로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용감한 어린이 행세를 잘하는 지극히 아이다운 아이였고, 오히려 누구보다 비판과 변화에 예민한 소심쟁이(?)였다.


매일 같이 골목을 뛰놀던 친구들이 하나둘 유치원 등원을 시작하고 결국 낮 시간에 함께 놀 사람이 없어 심심해지자, 7살 나이로 처음 유치원 문턱을 밟게 됐다. 근 세 달 나름대로 유치원 생활에 적응해가던 찰나 사건이 터졌다.



종이접기 시간, 유치원 담임 선생님께선 ‘깔끔하고 완벽한 종이접기’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고 아이들에게 따라 하도록 지시하셨다. 작품 검사를 위해 줄지어 선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선생님이 마침내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당연히 칭찬을 들을 거라 생각하며 당당히 작품을 건넸다.


-미술 재능이 0에 수렴해 그림도 종이접기도 평생 엉망이었지만 이때의 나는 자기 객관화가 부족했다. 집에선 가족들에게 늘 잘한단 소리만 듣고 자라서 안하무인이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선생님은 내 작품을 보더니 불호령을 내리셨다. “방석 접기 할 때는 꼭 네모 접기 두 번, 세모 접기 두 번 해서 삐져나온 부분 없이 깨끗하게 하라고 했잖니! 처음 단계인 방석 접기가 엉망이니 결과물이 이렇지!!”라고. 그때의 나는 혼났다는 그 사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스스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던 결과물이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집에 돌아온 나는 종일 우울감에 젖어있었고 다음날 아침 “유치원 가야지”라는 엄마의 말에 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을 버둥거리며 유치원에 다신 가지 않을 거라 떼를 쓰고 울었다. 애초에 거의 울음이 없던 나의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을 금치 못하던 엄마는 나를 데리고 유치원에 가 원장 선생님을 뵈었고, 원장 선생님은 그 선생님께서 애를 혼내고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갸웃하셨다. 결국 선생님까지 불러 진행한 불편한 사자대면을 마치고도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렇게 유치원을 그만두게 됐다.


TMI. 물론 학생이 된 후에 막무가내로 학교를 그만둔다고 떼쓰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이 일이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엄마는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만은 다녀달라고 어린 내 손을 꼭 붙잡고 부탁했다.



학교를 다니게 된 이후에도 소심쟁이 면모는 변할 줄을 몰랐는데, 친구들이나 선생님으로부터 안 좋은 얘기를 들으면 (직접 맞대응은 못하고) 며칠은 물론 몇 달, 몇 해고 마음 깊이 담아두는가 하면 혹여 시험을 망쳐 등수가 밀리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시험날엔 긴장감으로 배를 앓기 일쑤였다.


(참고로 주변에서 공부로 압박을 준다거나 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그저 건강히 자라주기만 해도 기쁜 늦둥이 막내딸이었으니. 남에게 지는 건 죽어도 싫은 오기 충만한 아이라 혼자 스트레스를 받았을 뿐이다.)


또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란 타이틀에 집착한 나머지 모두에게 좋은 평을 듣고 싶어 지나치게 가식적으로 살기도 했다. 그 가식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어 자꾸만 피곤해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사를 고민하던 엄마에게 전학은 절대 싫다고 고집을 피운 일화도 있는데, 다른 곳에 가서 행여 적응하지 못할까 두려움이 너무 큰 마음에 그랬다.


-결과적으로 좋은 곳, 좋아하는 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어서 지금도 잘한 행동이라 생각은 하지만 알게 모르게 속 썩인 기억이 많은 듯해 새삼 엄마에게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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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새로운 세상을 동경했고 주변에는 나중에 그 세상을 이끄는 중심이 될 거라 포부를 밝히고 다녔지만 사실 난 이렇게 나약했고 그런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따뜻하고 포근한 어른들의 울타리 안에서 예쁨 받는 학생으로 계속 남고 싶었다. 어른들에게 받는 칭찬, 친구들 사이에서의 위치, 약간의 의무감만 다하면 종일 주어지는 자유 등 달콤한 것 투성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른만의 전유물이라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것들이 나에겐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기도 하고 말이다.


작은 바람에도 쉬이 흔들리는 심약한 나는 법적 성인의 나이가 훌쩍 지나고서도 자신을 아직 어리다고, 좀 더 보호받고 누려야 할 나이라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겉으로는 “나 이제 어른이지”, “저도 나이 많아요~”라고 말은 해도 알게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아이 같은 면모를 내비쳤다. 세상엔 여전히 어른들이 넘쳤고 그들은 그런 모습을 귀엽게 봐주었다. 그게 좋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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