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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 Sep 26. 2024

어머니와 막내딸(8)

고향 집

 학교만 다 끝마치면 모든 것이 편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거처가 막막해졌다. 아저씨댁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핑계가 있어서 떳떳했지만 그냥 있으려니 불편했다. 이제 초등학교도 다 마치고 중학교는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더 있을 수도 없었고 매일매일이 지루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나 혼자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고 있었다. 뜻 밖에 오빠가 찾아오셨다. 나는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온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빠는 나를 데리러 오셨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주머니 아저씨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나도 모르게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워서 '왜? 이제 왔냐고' 오빠한테 볼멘소리로 말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때라고는 그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은근히 오빠가 와 주기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어서 짐 챙기라고 하셔서 방에 들어가 옷가지와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갑자기 떠나려니 모든 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주머니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다른 가족들은 얼굴도 못 보고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인사를 드렸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저씨네 올 때처럼 나는 오빠의 짐자전거 뒤에 타고 엉덩이가 아플 것을 생각해서 박스를 대고 오빠등을 바람막이로 삼아 얼굴을 기대고 덜컹 거리는 비포장도로와 시골길을 지나서 아산만 다리를 건너서 내가 살던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를 반겨줄 가족은 없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안 계시고 다른 오빠 언니들이 다 떠난 고향에 나 혼자만 큰 오빠네집 내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오빠네로 왔다고 해서 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카는 한 명이 더 태어났고 오빠 언니가 일을 하러 다니니 집안 살림까지는 아니어도 조카들도 돌보고 때에 따라서는 밥도 짓고 잔시부름도 하며 지냈다. 그러려고 오빠는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하루는 연탄에다 밥을 지어야 하는데 태워서 혼난 적도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냄새를 못 맡는다. 심해야 맡을 있고 약한 것은 맡지를 못한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밥을 하면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또 한 번은 텔레비전이 귀한 시절이어서 우리들은 올케언니를 중신한 아주머니댁으로 드라마를 보러 다녔었다. 그런데 올케언니는 꼭 내게 첫째 남자조카를 업히고 올케언니는 둘째 여자조카를 업고 다니는 것이었다. 조카가 서너 살은 되었고 남자아이라서 몸무게가 많이 나갔는지 아니면 내 몸무게가 적어서 그런지 그게 너무 힘이 들고 싫었다. 그런데 조카는 내 등에서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나는 밤길에 넘어질 수도 있어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더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카의 엉덩이를 꼬집고 말았다. 조카는 고모가 꼬집었다고 언니한테 이르고 나는 혼이 났다. 그리고 바로 후회를 했지만 그 일로 나는 눈치를 더 보게 되었다.

  아저씨댁에 있을 때는 오빠네가 나은 것 같았고 오빠네 있으니까 또 아저씨네 있는 것이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 조카들과 시름하면서 지내다가 오빠한테 방학 때 청소 당번이라고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을 했다. 혼자서는 또 갈 수 없어서 오빠한테 데려다 달라고 한 것이었다. 평택으로는 혼자 가본일이 없었지만 어떻게 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평택으로 해서 안중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가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몇 번 갈아타야 했지만 아산만으로(평택호) 가면 가까운데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불편했다. 오빠는 안 가면 안 되냐고 꼭 가야 하냐고 물었다. 나는 꼭 가서 청소도 하고 출석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오빠는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니 자전거로 데려다주고 올 때는 같이 못 온다고 했다. 학교만 갈 수 있으면 무조건 괜찮다고 했다. 

 오빠의 자전거를 타고 다시 아산만 다리를 건너서 학교를 갔다. 당번이라고 해서 학교에 왔는데 같이 하기로 했던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담임선생님도 계시지 않았다. 밖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는데 숙직 선생님이 오셔서 어떻게 왔냐고 물으셨다. 당번이라 왔다고 했더니 이 추운데 혼자서 왔냐고 친구는 안 왔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하니 추워서 오지 않은 것 같다고 하시면서 청소할 것 없으니 추운데 몸이나 녹이고 가라고 하셨다. 나는 청소해야 한다고 하니 괜찮다고 할 것도 없고 걱정하지 말고 그냥 앉아 있다 가라고 했다. 나는 잠시 있다가 갈길을 생각하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교무실을 나와 운동장을 다 걸어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몸이 추웠다. 그래도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하니 걸음을 재촉했다. 가다가 권관리에 사는 언니를 보고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언니를 꼭 보고 가야 했다. 언니는 지난번 보다 더 말라 있었다. 정말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언니가 너무 불쌍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아픈 와중에 언니는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고 추운데 어떻게 왔냐고 내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앉아서 언니랑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언니를 남겨 놓고 돌아서서 오는 내내 울었다. 너무나 야윈 언니모습에서 어쩌면 그것이 언니의 마지막이 될 줄 그때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걸어서 오는데 왜 그렇게 아산만 다리가 줄어들지 않는지 앞을 봐도 뒤를 돌아보아도 어느 쪽으로도 줄어들지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걷고 또 걸어왔을 때었다. 경운기 한대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저것을 태워 달라고 할걸 그랬나 속으로 생각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경운기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 경운기가 멈추었다. 거기에는 아주머니도 타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물으셨다. '학생 어디까지 가는데 혼자서 걸어가는 거야 가는 데까지 이거라도 타고 갈까? 나는 네! 했지만 대답도 하기 전에 내 몸은 경운기에 오르고 있었다. 경운기를 타고 오니 그때서야 걸어서 오는 것보다 빨리 오게 되었다. 경운기와 가는 길이 달라서 나는 아산만 다리를 건너서 바로 내렸다. 나는 아저씨 아주머니께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몇 번씩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멀리서 공세리 성당이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낮 열두 시 점심시간만 되면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왔지만 오늘은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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