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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 Sep 07. 2024

어머니와 막내딸(7)

방황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저씨 여동생네 고모님이라고 했다. 그 고모님 댁에는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아들이 커서 나가 있고 고모부랑 둘이만 살고 있는데 아저씨네 와서 보니 조카들하고 얹혀살고 있는 나까지 계집애들이 많이 있어 떠들고 잔심부름도 하고 고모가 보시기에 참 좋으셨었나보다. 여름 방학 때 하루는 아주머니가 고모네 가서 살지 않겠냐고 그러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공부도 가르쳐주고 이다음에 시집도 보네 준다고 하셨다. 가서 말 잘 듣고 심부름하면서 살면 된다고 하시면서 한번 가보자고 하셨다. 난 싫다고 했지만 그래도 집도 가서보고 좋은지 나쁜지 결정하라고 하셨다. 처음부터 갈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공부할 생각을 하면 또 욕심이 생겼었다. 고모님네는 시골집인데도 넓고 좋았다.  앞에는 정자도 있었고 주변에 밭이 다 고모님 네 거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일주일 동안 지내다가 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절한 것은 가족 때문이었다. 거기 가서 살면 엄마도 못 보고 언니 오빠들도 하나도 못 본다는 사실이 싫었다. 한 번 그곳에 가면 나는 다시는 가족들을 못 보고 사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머니께 그냥 가지 않고 여기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가을에 나를 보러 아저씨댁에 찾아오셨었다. 나는 좋아서 엄마 곁에 떨어져 있지 않고 졸졸 따라다녔다. 엄마가 보시기에 안 됐는지 일거리를 잠시 밀쳐두고 마당 한구석에서 나를 무릎에 누이고 얼굴도 쓰다듬고 머리도 매만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 언니가 육성회비를 제때에 못주고 미루는 바람에 울면서 학교를 가고 있었다. 학교 가는 길에는 꼭 아저씨네 마당을 거쳐서 가야 했다. 안 그러면 멀리 돌아서 가야 하고 길도 멀었다. 그런 나를 아주머니가 보고 왜 울면서 가냐고 물어서 육성회비 때문에 그렇다고 하니 그게 얼마냐고 물으시며 대신 주시기도 했었다. 

 학교 운동회날 준비로 곤봉을 가져오라고 해 다락방에 올라가 미리 제 짝을 맞추어서 다음날 가져가려고 하면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 먼저 가지고 가버려서 나는 다시 곤봉을 찾고 짝을 맞추려 해도 맞지 않아 무거운 것을 가져가기도 했다고 그동안 엄마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웃으면서 속상한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운동회 할 때 선생님 도시락을 얻어먹은 생각이 났다. 학교와 집이 가까워서 우리들은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먹고 오는 일이 많았었다. 운동회 날도 엄마는 집에 가서 먹는 줄 알고 도시락을 챙겨 오지 않으셨다. 점심시간 다음에 바로 게임을 준비해야 하는데 집에 가서 먹고 오면 늦는다고 나는 화를 내면서 집에 가려다 말고 골이 나서 창고 옆에 서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어디서 보셨는지 선생님 도시락을 갖고 오셨다. 날더러 먹으라고 했지만 내가 선생님 도시락을 먹으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냐고 싫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또 있다고 다른 선생님들과 또 부모님들이 싸 오셔서 있으니 걱정 말고 먹으라고 했다. 도시락을 열어보니 선생님처럼 예쁘게 반찬도 가지런히 선생님의 정성이 들어있는 맛있는 도시락을 먹었다. 선생님은 우리 집 옆에 바로 하숙을 하고 계셔서 다른 학생들보다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얼마 되지 않아서 아주머니가 바쁜데 일 안 하고 거기서 뭐 하고 있냐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엄마와 나는 깜짝 놀라서 일어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잠시 나를 보러 오셨지만 바쁜 농사철이라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나와 제대로 있지도 못하고 일만 거들다 그냥 가셨다.  


 해가 바뀌어서 오빠들은 고등학교 언니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오빠 언니들이 늦게 오는 만큼 내 일은 점점 늘어만 갔다. 학교에서 한 친구는 나를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울 생각을 했다. 힘이나 말로 나는 그 친구에 비해서 다 약했지만 그러나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계속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아서 있는 힘껏 덤벼 들었다. 질 것이 뻔한데도 싸운 것이었다. 친구들이 말려서 머리채 잡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는 다른 친구들과 싸우는 일은 없었다. 정말 하루빨리 내가 커서 힘이 세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앞으로 서른 살 마흔 살 아니 오십 살 까지는 살 수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살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6학년이 되면서 나는 더 초조해지고 걱정이 되었다. 중학교를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 선생님은 진학할 학생들을 체크하고 있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난 집에서도 아무 말도 못 했다. 생각은 아저씨한테 나도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이다음에 제가 커서 돈 벌어서 갚아 드리겠다고 그러니 보내달라고 꼭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고등학교 둘 중학교가 둘 내년이면 다섯 큰오빠가 졸업을 해도 네 명이 다녀야 하는데 어린 내가 보아도 힘들 것 같아서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하려고 했지만 혼자서 끙끙 앓고 끝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두고두고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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