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보금자리
고민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구박받고 눈치 보는 것이 똑같다면 차라리 남아 있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졸업도 못하고 다시 가서 학교를 다니는 것도 창피해 서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8촌 당숙아저씨댁에서 남은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정했는데도 막상 오빠네가 이사 간다고 하니 눈물이 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마음이 속이 상해서 눈물이 자꾸만 났다. 이삿짐이 실리고 올케언니와 조카는 짐차에 타고 가고 오빠는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몇 안 되는 옷가지와 교과서 책을 싣고 아저씨네 댁으로 갔다. 난 속으로 아직 늦지 않았는데 그냥 간다고 할걸 그랬나 하는 마음이 또 자꾸 떠올랐지만 어린 마음에 번복하기도 싫고 내가 결정한 것에 굳게 다짐을 했다.
아저씨네 집에 데려다 놓고 오빠는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집모퉁이에서 오빠가 가는 뒷모습을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는데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저씨네 가족은 할머니와 아주머니 직장에 다니는 큰 언니들 셋과 또 학교를 다니는 오빠 두 명과 나보다 두 살 위 언니지만 학교는 늦게 들어가서 1년 선배인 언니가 있고 또 나와 동갑인데 학교를 늦게 들어가고 생일이 늦어서 내가 정해 놓은 동생이 있었다. 꼭 아저씨네는 아니지만
옛날에는 학교를 제 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태어나도 출생신고를 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이 들어 생사를 알 수가 없어서 병이 나으면 그때서 늦게 출생 신고를 했고 벌금은 없었다. 그래서 실제 나이와 학교 나이가 다 다르고 또 학교를 들어가도 졸업을 못 하는 경우도 많았다.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동생들 돌봐주느라 그렇게 공부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가고 싶어도 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정이 많이 있었다. 나는 제 나이에 학교는 들어갔지만 호적을 살펴보면 실제 생일과 호적 생일이 다르게 되어 있어서 이 또한 의심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집에는 나까지 여덟 명의 가족이 있었다. 아저씨는 쌀장사를 하셔서 매일 바쁘셨다. 방앗간에 가서 쌀을 사서 이문을 남기고 사람들한테 파는 일이었다.
오빠네가 있어서 아저씨네를 왔다 갔다 하며 지낼 때 하고는 모든 것이 달랐다. 나는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고 조카를 봐주는 대신에 일을 해야만 했다. 여기서는 우리 집도 아니고 더 이상 나는 막내가 아니었다. 응석을 부릴 수도 받아줄 내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니 밥값을 해야 했다. 소도 키우고 밭 하고 논농사도 많았다. 아침저녁으로 소죽솥에 불 때는 것은 내 차지였다. 저녁에 설거지 담당도 나였다. 언니는 물 길어다 솥에 붓고 동생은 밥솥을 씻는 것이었다. 작은 쇠솥에 불을 때서 밥 지은 솥은 닦기가 힘이 들었는지 잘하지 않아서 그것도 언니랑 내가 할 때가 많았다. 여럿이 싸우지 않게 일을 맡아서 하기로 했지만 동생은 매일 끼 피우고 제대로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와 같이 밥을 지을 때도 있었다. 밥상은 두 군데로 나누어서 차렸다. 한 상은 할머니와 아저씨가 진지를 드시고 두 오빠들도 같이 먹었고 또 다른 밥상에는 아주머니가 드시고 우리들 셋이 같이 먹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안 그러다가 겨울에 밥을 먹을 때면 내가 콧물이 흘러서 훌쩍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아침밥을 먹을 때 그러면 나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나올 때가 있었다.
우리들은 초등학생으로 같은 학교를 나란히 4,5, 6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한창 놀러 다닐 나이에도 그러지 못하고 집안일을 거들어 드렸다.
밭에 가서 보리도 밟아주고 풀도 뽑고 일하고 쉬는 틈을 타서 동생은 수로 건너편으로 넘어가서 산에 있는 아구배도 따먹었다. 나는 무서워서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처음 먹어보는 아구배는 떫은맛이었다. 익으면 새까맣게 되는데 맛이 있어서 먹는 것은 아니었다. 일을 할 때도 노는 것도 다 같이 했다. 그래야 아주머니께 혼이나도 덜 혼나고 서로 일러바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빠와 아주머니가 논에 가서 농약을 줄 때는 줄도 잡아주고 약이 잘 나올 수 있게 펌프질을 해주었다. 물론 나 혼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둘이 마주 보고 서서 손잡이를 잡고 밀고 당기는 수동식 기계라 혼자는 힘이 들어서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추운 겨울밤 할머니 하고 잘 때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것 같았다.
할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자 우리들은 학교를 가지 않았다. 나는 가야 한다고 했지만 동생은 가지 않아도 된다고 안 가는 거라고 했다. 있어도 우리들이 할 일은 없었는데도 우리 둘은 누구한테 여쭈어보지도 않고 가기 싫어서 안 갔다. 그렇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가족도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자리에는 언니가 와서 잤다. 내가 언니랑 잘 때가 제일 힘들었었다. 언니는 아랫목에서 나는 윗목에서 잤다. 소죽솥에 불을 때서 데워진 아랫목은 따뜻했지만 윗목에는 그리 따뜻하지 않았고 이불도 각자 덮었다. 발이 시려서 아랫목 요 밑으로 발을 넣으면 언니가 싫어해서 넣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혼자 춥고 슬퍼서 엄마도 보고 싶고 언니 오빠들도 보고 싶어서 이불속에서 자고 있는 언니가 들리지 않게 숨죽여가면서 울었다.
그러나 그렇게 있어도 가족 누구 하나 미워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