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이 Oct 26. 2024

어머니와 막내딸(10)

성장의 고통

 먼동이 뜨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벼 부엌으로 갔다. 세수하고 무엇부터 할 것인지 순서를 생각해 놓았다. 혼자서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고 항상 허리를 굽히거나 앉아서 일을 해야 하는 좁은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할머니 한 분을 보살펴 드리는 조건으로 밥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심부름하며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도 승낙을 했었다. 많은 일을 하기에는 내가 약해서 어머니도 걱정이 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할머님 혼자라고 해도 식구는 나까지 네 식구였다. 할머님 시중도 들고 청소하고 또 반찬을 만들어서 할머님 자녀들한테 갖다 주고 빨랫감도 가져오고 일주일에 몇 번씩 가서 학원 청소도 해주어서 두 집 살림을 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겨울에 보일러실에 빨래를 너는데  '학생이 오고 나서 빨랫줄이 비어 있는 날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몇 달 되지 않아서 할머님이 사시는 짐옮겨서 피아노학원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에는 피아노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언니와 몇 년째 사법고시를 하고 있는 오빠가 살고 있었다. 이제 할머님의 자녀들까지 모든 것을 챙기게 되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오빠 아침을 챙겨주고 도시락은 점심 저녁으로 먹게 두 개씩 싸주었다. 연탄불 사용으로 불편해서 도시락 반찬은 항상 낮에 미리 만들어 놓아야 했다. 겨울에 아궁이 연탄불에서 국도 끓이고 찌게도 하고 찬거리를 만들었다. 또 한 군데 바깥 출입구 쪽에 연탄화덕을 놓고 물을 데워 세수하고 머리를 감을 수 있게 물을 보충해 놓기도 했다. 잘 못해서 연탄불이 꺼지면 번개탄으로 피우고 한쪽에서 살려서 다른 쪽으로 옮기기도 하고 연탄불과 씨름하는 날도 있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화덕에 밥을 안쳐놓고 끓을 동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따뜻한 화롯불처럼 온몸에 온기가 느껴져 눈이 저절로 감겨 꾸벅꾸벅 졸기도 했었다. 그럴 때 가끔 주인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보신 적이 있어 민망할 때도 있었다. 밥이 끓으면 상을 차려주고 도시락을 챙겨서 오빠를 학원에 보내고 치우고 다시 밥상을 차려 할머니와 언니랑 같이 아침을 먹고 치우고 청소하고 빨래를 했다. 언니가 오빠랑 둘이 있을 때는 제대로 밥도 안 하고 사 먹고 학원이라 냄새도 나고 일할 시간도 없어서 불편했는데 이제 내가 있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집안 살림을 해봐서 알고 있지만 내 집에서 하는 일과 돈 받고 일을 할 때는 전혀 달랐다. 자유의 시간도 없었고 잠시도 쉴 수 없이 일을 했으며 없으면 만들어서 하게 했었다. 지금처럼 전기밥솥이며 세탁기 청소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밥을 했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고 손에서 물이 마를 사이가 없어 손등이 터져 쓰라린 고통은 추운 겨울보다도 더 시리고 따가웠다.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다 보니 이 일도 익숙해지고 쉴 수 있는 날도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 시간이 있을 때 피아노 치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부엌에서 반찬 하기가 힘들어 보였는지 어느 날 언니가 커다란 물건 하나를 사 갖고 들어 왔다. '석유풍로'라는 것이었다. 요리할 때는 편했지만 냄새에 머리가 아파서 사용하기가 불편했다. 


 그렇게 보기에는 괜찮았는데 모든 것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었는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언제부터인지 조금씩 천천히 내 몸에 좀이 먹기 시작하고 있었다. 밥도 못 먹고 힘도 없이 쓰러질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감기를 심하게 앓은 적도 없는데 그런데 자꾸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 끙끙 앓고 있다가 더 심해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언니가 큰 병원에 데리고 갔다. 대림동에 있는 성모병원이었다. 어디가 아픈지 증상이 어떤지 물었지만 나는 대답을 잘 못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결과를 확인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결핵'이라고 했다. 나는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리될 줄 알고 아픈 걸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사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어떤 질문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또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앞이 깜깜할 뿐이었다. 그렇게 언니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왔다. 언니는 내게 간단한 짐을 챙기라고 일러주고 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다 챙기고 싶었는데 언니는 금세 병이 낫는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밤새 많은 생각을 했지만 갈데라고는 오빠네 밖에 없었다. 다음 날 할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언니가 사 온 조카들 선물을 가지고 평택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다시 큰 오빠네로 갔다. 


 오빠와 언니는 처음에 깜짝 놀라며 어쩐 일이냐고 반가워했지만 아파서 왔다고 하니 언니의 안색이 달라졌다. 더구나 결핵이라고 하니 언니가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병이 균으로 옮기는 것이니 어린 조카들 때문에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고 생각했다. 또 큰 언니도 오래 이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한 달쯤 되어서 오빠랑 서울에 가서 나머지 가방을 챙겨 내려왔다. 


 그렇게 나는 언니와 병마를 사이에 두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2년 뒤 서울 다른 곳에 있을 때 피아노집 언니가 임신한 몸으로 평택 소개해 준 집을 찾아와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깔끔하게 일도 잘하고 반찬도 잘해서 아이 낳을 때 같이 있고 싶고 월급도 많이 주겠다며 내가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했지만 그 집에서 모른다고 했다. 통사정을 해서 내 연락처는 모르고 어머니께 연락을 하셨지만 어머니도 안 된다고 하시자 그러면  얼굴이라도 보게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는 것도 어머니는 거절을 하셨다고 했다. 아이 낳으면 일거리도 더 많은데 그곳에서 아파서 내려왔는데 또 보낼 수 없다고 거듭 거절을 하셨다고 했다.)






작가의 이전글 어머니와 막내딸(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