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이 Jul 30. 2024

어머니와 막내딸(2)

어린 시절

 옛날에는 무엇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는지 시골에는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농사일은 봄부터 가을까지만 있었고 겨울에는 농사지은 걸로 한 해를 먹고살았다.

 아버지는 쟁기로 논밭 가는 일을 하시고 겨울에는 가마니를 짜서 팔았다. 또 가끔 누가 땅이나 집을 팔면 중간에서 흥정을 하시는 일도 하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부동산 중개업 일이었다. 수고비로 몇 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약주 한잔 얻어드시는 것이 아버지는 제일 좋아하셨을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가 잘하시는 것은 시조를 읊으시는 것이었다. 늘 하시던 시조 한가락이 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이지만 나는 첫 소절인 청산리 벽계수 만 따라 했고, 그 뒤에 소절은 할 줄도 모르고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는 늘 마실꾼들이 있었다. 특히 겨울밤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오셔서 밤늦게까지 짚으로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아서 그걸로 농사지을 때 쓰기도 하고 가을에 초가지붕에 쓸 이엉을 엮어서 팔기도 했다. 농사일이 없는 집에서는 품삯을 받았지만 같이 농사짓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품앗이를 했다. 또 화투를 치시고 새벽에 가실 때도 있었고 쪽잠을 주무시고 가실 때도 있었다. 가끔 약주를 드시고 다투시는 일도 있었다.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부모님이 안 계시면 우리 집으로 찾으러 오시고 하루라도 거르면 궁금하다고 하실정도였다. 그 많은 날들 밤이면 밤마다 오셨지만 부모님들은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있었다면 어르신들이 그렇게 날마다 오시지 안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는 화투 치시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등잔불 밑에서 공부하다가  70년대 초 시골에도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왔다. 동네 부잣집에서는 텔레비전을 사서 돈을 받고 보여주고, 우리들은 돈을 내고 보러 다녔지만 날마다 가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10원씩 내고 다녔지만  한참 지나고 나서 이것도 올라 20원을 받았다. 처음 텔레비전을 산 누구네는 돈을 받아서 텔레비전 값을 벌고도 남았을 정도라고 했었다. 그만큼 텔레비전은 신기했고 동네 몇 대 없어서 많이들 보러 다녔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남자보다는 여자가 할 일이 더 많아서 일자리 구하기가 쉬웠었다. 그래서 아버지보다도 어머니가 서울로 돈 벌러 가셨었다. 주로 식당 주방일이었지만 아주 어려서 나를 누구에게 맡기고 가신 것 같아 한 번은 어머니께 여쭈어보았었다.

 그 뒤에 우리들이 자라서 농사일로는 생활이 어렵고 겨울에 일거리가 많지 않아서 엄마는 한 동안 서울로 돈 벌러 가셨었다. 이불공장에 주방일을 하셨다. 날마다 밥하고 빨래하고 손에서 물이 마를 사이도 없이 일을 하셨고 어린 딸이 걱정이 되어 너무 힘이 들어 내려오셨다고 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저녁 무렵 나는 뒷집 언니네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다른 언니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저 언덕 위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머리에 큰 보따리를 이고 내려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이 누군지 몰라서 그냥 놀고 있었다. 그랬더니 옆에 언니들이 '옥가 너네 엄마 오신다 네네 엄마야!' 하는데도 나는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다가오시더니 두 팔을 벌려서 "아가 엄마야 이리 와 옥아 이리 와 엄마야" 하는데도 나는 쳐다보고 가지 않았다. 내 엄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랬더니 엄마가 머리에서 보따리를 내려놓고 내게 다가와 "아가 엄마야 엄마 이리 와"라고 하면서 가까이다가 와서 나를 번쩍 안아 주었다. 그때서야  나는 엄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엄마'라고 따라서 말을 했다.  이 광경을 다른 언니들이 다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내려놓았던 보따리를 다시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따리 속에는 우리들 옷하고 이불을 지을 때 쓰는 조각천들이 잔뜩 있었다. 


 엄마가 안 계실 때 아버지 언니 오빠는 집에 있었다. 그런데 누가 있어서 나를 돌봐주고 있었는지 다른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로지 이 기억만이 어릴 적 기억 속에 늘 남아 있었다. 막내로 늦게 태어 난만큼 귀여움과 사랑은 많이 받았지만 또 그만큼 고생을 제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어머니와 막내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