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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공 Mar 16. 2020

[서평] 김승옥 『내가 훔친 여름』

방황하는 청춘의 우울

  내가, 내가 아니라고 느낄 때.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감으로 자신을 의심하다가 나란 사람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인지, 자신을 향한 원인 모를 적개심에 괜한 과거의 상처를 들추어내며 불완전한 내 모습의 근원을 찾아보려는 시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회에 어울려 지내지 못하는 다소 자폐적인 내면의 모습과 그럼에도 힘들여 선웃음을 지어 보이면 어떻게든 그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지내왔던 암흑기. 물론 이 암흑의 시간은 지금도 종종 남모르는 새벽에 찾아와 나를 괴롭게 하지만 그 누구도 자기만의 어둠이 있다는 이야기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며 지내던 시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유행한다는 말투와 표현들을 애써 익혀, 다시 사람들 앞에 서봤던 경험들. 남을 모방하면서 대세의 흐름이 나도 함께 쓸어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내가 있을 곳은, 그곳이 아니라며 나를 잡아끌던 또 다른 나. 그리곤 어느 쪽이 진짜 내 모습인지 혼란스러워 불면의 밤을 보냈던 날들.




  김승옥의 소설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자의식과 주체의식, ‘나’라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의 과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방황하는 인물들과 불확실한 자신의 모습에 그들이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일들은 반드시 소설 속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 일들은 그때의 내가 저질러 보고 싶었으나 차마 저지르지 못했던 일탈이었고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은밀하게 상상 속에서만 실행해 보았던 공상들이다. 

    



  『내가 훔친 여름』은 학창시절 친구였던 영일과 창수가 여름의 여수로 무전여행을 가서 겪는 1일 동안의 이야기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해 고향 무진에서 지내고 있던 창수에게 중학교 친구 영일이 찾아온다. 서울대 법대생도 아니면서 서울대학교의 배지를 차고서 서울대생이라고 사기를 치는 영일과 함께 창수는 여수로 여행을 떠난다. 사기꾼의 면모를 가진 영일을 창수는 경계하지만, 점점 영일이 이끄는 여행에 녹아든다. 땡전 한 푼 없이 여수로 향하는 그들은 차표도 없이 기차를 타고, 여수에 도착해서는 문리대 생인 창수를 실내디자인을 배우는 서울대 학생으로 둔갑시킨 영일 덕에 일감을 얻는다. 하지만 거짓과 위선으로 공짜 밥을 얻어먹고, 일을 해야 하는 창수는 못내 불편하여 진실을 털어놓고 싶지만, 영일을 생각하는 마음에 쉽사리 그렇게 하지 못한다. 



    

  거짓된 신분과 진실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고민하는 창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왠지 선뜻 돌아가지지 않는 발걸음. 방황하는 청춘이 여름의 여수에서 느끼는 감각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겪었을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과 고뇌이다. 그리고 그의 고뇌가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 끝난다는 것이며 이는 곧 ‘나’라는 실존에 대한 질문이 우리가 죽는 날까지 놓아서는 안 될 의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는 것은 방황하는 자신에 대한 인정 그뿐이다.

   

  “이것이 여름일까? 그래 이것이 여름이다. 비치파라솔, 눈부신 백사장, 검푸르고 부드러운 파도, 빨간 수영복, 풍만한 아가씨의 웃는 얼굴, 하얗고 가지런한 이빨, 짧기 때문에 유쾌한 자유, 그것들은 나의 여름이 아니다. 나의 여름은, 차표 없어 불안한 기차여행, 신분을 속여 맡은 일거리, 땀내음에 찌든 아가씨, 겁탈 같은 유혹, 비린내 나는 여인숙에서의 정사, 그러고 나면 기다리고 있는 괴로운 휴식과의 만남일 뿐이다.”
(김승옥, 『내가 훔친 여름』, 문학동네, 2018, 224 -22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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