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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양세계 Jul 04. 2023

여주의 씁쓸함

로버트 하인라인의 SF소설 여름으로 가는 문』의 도입부에서는 발바닥이 시린 고양이 피트가 따뜻한 여름으로 가는 문을 찾아다닌다. 여름으로 가는 문이 있다면 나는 문지방을 밟기 전부터 두근거리며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할 것 같다. 우선 플레이 리스트를 여름 느낌이 나는 곡들로 가득 채워야 한다. 페퍼톤스의 「New Hippie Generation」은 여름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 일상의 배경음악이 되어주는 노래이다. 신재평 님의 비음을 사랑하기도 하고 청량하지만 아련하게 시작하는 도입부가 좋다. 그리고 시장에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하는 포도, 수박, 풋사과, 물복숭아, 오이, 여주 등 좋아하는 여름 과일과 채소들로 냉장고를 채우면 여름으로 가는 문은 더욱 활짝 열린다.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로 단연 여주볶음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점을 꼽겠다. ‘고야 참프루’라고도 불리는 오키나와 전통 요리인 이 음식은 여주와 계란, 두부, 햄 등을 함께 볶아서 만든다. 나는 이 요리를 너무 좋아해서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아직 싹이 트지도 않은 여주를 군침 흘리며 기다리는데, 텃밭을 가꾸시는 부모님께 매주 여주의 안부와 성장 속도를 물으며 호시탐탐 잡아먹을 타이밍을 노린다. 

여주 볶음을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우선 여주를 반으로 갈라 쓴맛이 나는 씨를 숟가락으로 모두 긁어서 뺀 뒤, 눈썹 모양으로 최대한 얇게 썰어서 소금물에 담가 둔다. 최소 삼십 분을 담그라고 하지만 넉넉히 세 시간쯤 담가 두면 쓴맛이 심하게 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두부와 햄, 양파를 썰어서 볶다가 그 팬에 그대로 계란을 스크램블 해서 같이 볶는다(좀 더 담백하게 먹고 싶으면 햄을 빼면 된다). 거기에 물에서 건져 대충 물기를 짠 여주를 넣고 강한 불로 짧게 휘리릭 볶는다. 너무 오래 볶으면 여주가 흐물거려서 식감이 별로다. 이때 간장과 설탕, 굴소스를 조합한 소스도 함께 넣어 볶아주면 끝이다. 참기름까지 둘러주면 완벽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더워서 입맛 없는 여름날 저녁에는 무알콜 맥주와 여주볶음 한 접시면 저녁이 뚝딱 해결된다. 내가 여주볶음을 하도 찬양하니까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오빠가 기대에 차서 따라 만들었다가 그냥 먹어도 맛있는 조합에 왜 굳이 그렇게 쓴 걸 넣어서 먹느냐고 나를 타박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여주볶음의 핵심은 그 씁쓸함에 있다.




여름도 여주볶음처럼 어딘가 씁쓸해지는 여운이 느껴진다. 나무들이 싱그럽고 날씨는 미치게 좋은데 그게 영원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마치 짧게 끝나버린 학창 시절의 첫사랑 같아 어딘가 풋풋하면서 아련한 슬픔이 느껴진다.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게 하는 여름의 멜랑콜리한 아름다움이 좋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록 페스티벌에 미쳐 지냈다. 항상 여름이면 바다 근처에서 열리는 록 페스티벌을 보러 갔다. 여름은 마치 록 페스티벌에 나온 헤드라이너(공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간판 밴드)의 앙코르 곡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너무 좋은데 곧 끝날 것을 아는 기분. 헤드라이너의 공연을 보고 난 후 흥과 여운에 취해 어두워진 모래사장을 걸었다. 새카매진 밤바다를 보면서 이 바다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친구와 킬킬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까매서 우주까지 이어져 있을 것 같던 그 바다 앞에서 우리는 ‘어딘가 떠 있을 명왕성을 향해’ 손을 열심히 흔들어주었다. 그때 본 바다는 무한대의 공간으로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보였는데, 결국 그 밤도 끝나버렸고 헤드라이너였던 우리의 최애 밴드는 시간이 지나 해체했으며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방방 뛰게 만들었던 내 체력도 어디론가 사라져 지금은 긴 외출 후면 골골대는 어른이 되었다. 


하고 싶었던 말들이 목구멍을 간질거리던 밤들, 취해서 마구 주절거리며 웃던 웃음소리들, 후텁지근한 바닷바람 속에서 말없이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순간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모두 까만 세월의 파도에 쓸려나가 무한대의 우주 속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솜씨 좋은 요리사처럼 씁쓸했던 기억들을 아름답게 바꿔준다. 그리고 끝이 있다는 씁쓸함은 여름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올여름에도 나는 부지런히 여주볶음을 만들어 먹을 것 같다. 여름은 그만큼 맛있을 것이고, 그 씁쓸한 여운은 또 오래고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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