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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양세계 Nov 04. 2022

행복 처방전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 때 오늘 최고였다는 기분이 드시나요?" 

이렇게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답을 내놓는다는 게 흥미롭다. 서로를 처음 알아갈 때 취미가 무엇인지, 주말에 뭘 하는지, 으레 묻는 질문보다 뻔하지 않은 대답을 들을 수 있어서 재미있기도 하다.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물었을 때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오랜 친구라도 뜻밖의 대답을 할 때가 많아서 그 사람을 새롭게 알아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다이어리에 적은 ‘할 일’ 리스트에 모두 체크했을 때 뿌듯함을 느끼며 오늘을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있어 ‘오늘’은 목표한 일들을 끝낼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고 ‘하루’는 눈을 뜨자마자 잠들 때까지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타이머가 맞춰진 시간의 길이이다. 친구들이 말해준 행복한 하루는 날씨가 유난히 좋은 날, 혹은 별로 걱정할 일이 없는 날 등등으로 다양했다. 모두에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은 같지만 각자 성향에 따라 행복한 하루의 모습은 제각기 다르다.

 


나의 다이어리에는 일 년 중 행복했던 하루를 특별히 따로 기록하는 페이지가 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관찰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기록이다. 다이어리를 일 년 동안 써도 생각보다 그 페이지를 2장 이상 채우는 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거길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오늘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자면 연차를 내고 마티네(낮에 펼쳐지는 공연)를 보러 가다가 길바닥에서 문득 쏟아지는 햇빛을 느꼈던 날, 친구들과 피크닉을 가서 잔디밭에 하릴없이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 날, 그리고 유튜버 자도르 님의 레시피대로 구운 달콤 쌉싸름한 레드벨벳 케이크와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같이 먹은 날, 나는 행복을 느꼈다. 


행복함은 슈팅스타 아이스크림같이 찰나의 짜릿짜릿한 감정이 긴 하루를 잠깐 스치고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순간의 행복들을 잔뜩 기록하고 보니 나의 오늘을 확실하게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햇빛 한 줌과(연차 쓴 날의 햇빛일수록 더 효과가 좋다) ‘혈중자연농도’를 채우는 일,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와 적절한 문화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우울한 날들이 닥쳐올 때 급속한 행복을 위해 나에게 하나씩 처방해봐야겠다. 



행복했던 순간을 기록하는 것은 그 행복을 박제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비록 사진으로 남기진 못했지만 다이어리에 기록해둔 행복했던 여행의 한 장면은 이러하다. 수년 전 친구와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투어를 신청하게 되었다. 밤에 보트를 타고 강가에 있는 맹그로브 나무에 사는 반딧불이를 보러 가는 투어였다. 반딧불이들이 빛에 예민해서 플래시같이 빛이 터지는 촬영은 엄격히 금지된 데다, 어두워서 어차피 사진이 제대로 찍히지도 않을 것 같아 나는 휴대폰을 깊숙이 넣고 꺼내지 않았다. 어둡고 새카만 밤, 배가 물살을 가르며 강가를 따라 이동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부드럽게 살갗을 스쳤고 물결에 따라 배가 출렁일 때마다 우리도 같이 출렁였다. 


배에는 나와 내 친구, 모르는 여행객 한 명과 가이드들이 타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말이 없었다. 어린 시절 무인도를 배경으로 한 만화를 읽은 뒤로 비밀스럽게 꿈꿔왔던 탐험의 순간이 나에게도 드디어 시작되는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다가 배가 멈춰 섰을 때, 물가의 키 큰 나무의 꼭대기 부근에 크리스마스 전구가 반짝이는 것 같은 옅은 빛의 무리가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반딧불이를 본 순간이었다. 모두가 숨죽인 채 지켜보는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들이 다 같이 모여 조용한 빛의 축제를 벌이는 것 같았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고 그때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지만 오히려 사진을 신경 쓰지 않으니 오감을 활용해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때의 습도와 반짝임, 탄성이 나오던 장면들은 지금도 행복한 기억으로 생생하게 다이어리 속에 박제되어 있다. 


인생을 긴 띠처럼 펼쳐놓았을 때 행복했던 순간들은 짧은 방점처럼 찍히겠지만 이런 하루들을 처방전 삼아 나아가고 싶다. 나의 남은 다이어리가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하루들로 빼곡히 채워지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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