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술을 하지 않는다. 맨 정신으로 못하는 말을 할 수 있어서, 술이 있으면 분위기가 더해져서 좋다는데 나는 그런 재미를 모른다. (사실 그래서 싫다. 맨 정신으로 못 할 말은 안 해야 하고 술 없어도 분위기가 좋을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좋아서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던데 나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싫어서 술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술을 마시고 평소에 못할 말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평소에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것이나 그것을 보는 것이나 내 취미가 아니었다. 보통의 경우 나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그때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친한 언니 한 명은 술을 매우 즐기는 편이라 내가 이십 대 일 때부터 (지금보다 더 꽉 막혀있었다.) 점심 식사를 하면 꼭 맥주 한잔을 곁들였는데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차가운 맥주 한잔을 즐기는 언니의 모습은 멋졌다. 언니는 술의 종류가 섞이든, 언제 얼마큼이든 술을 마시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술을 마셨다고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랬다 하더라도 언니에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십 대 후반에 만났던 외국 친구들은 한국 친구들과 즐기는 술 문화가 또 달랐다. 학교 선생님이라 일찍 퇴근을 하고 해운대 바닷가에 모여서 놀고 있으면 내가 늦게 퇴근해 합류했고 편의점에서 병맥주를 사서 바다를 보면서 곱게 술을 마시다가 뒷정리를 잘하고 가거나, 간혹 악토버 페스트 같은 행사를 하면 그를 즐기러 갔었다.
월-금은 길고 주말은 짧다. 토요일 오전까지 일을 하고 나면 일주일간 어질러놓은 집을 치우는 토요일 점심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보통 집에서 밥을 먹고, 간단하게 산책을 나가 엄마 집에 들러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해 먹고, 영화를 보고 놀거나 날씨가 좋으면 밤 운동을 나간다. 일요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려고 하는데 실패하여 오전) 샌드위치를 사서 할머니에게 배달을 하고, 점심때쯤 돌아와 브런치를 만들어 먹고 자전거를 타거나 커피를 한잔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해 먹는다. 나는 코로나 이후의 삶이 크게 불편한 점이 없다. 요가를 쉬고 있고 할머니와 식사를 하지 않고 만날 때 신경이 많이 쓰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원래부터 일 하는 시간이 길었던 평일의 스케줄과 밖을 잘 나가지 않았던 주말은 비슷하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않고 (어차피 일 때문에 하루에 평균 열 사람 이상의 얼굴을 본다)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유형의 삶에는 코로나의 영향력이 적었다. 코로나가 시작된 첫 해에는 7월까지 날씨가 너무나 좋아 바닷가로 자주 산책을 갔고, 그다음 해는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와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예쁜 라벨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 삼성동에 가면 현대백화점 지하에 와인을 파는 곳에 한 번씩 들러보다가 갑자기 내추럴 와인 몇 가지를 가지고 싶어 구매하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해 떠났던 이탈리아 여행에서 찾은 한 와이너리에서 구매했던 레드와인은 너무 쓰고 짠맛이 나 한동안은 와인에 관심이 더욱 멀어졌는데 요즘은 귀엽고 예쁘게 나오는 와인들이 너무 많아 방문할 때마다 고민해서 골라 집으로 배송받는다.
작년부터 입버릇처럼 프랑스식 식사를 해야겠다는 말을 했었다. (개그였다. 다이어트를 위해 적게 먹겠다는 의도의.) 프랑스 여자들의 다이어트에 대한 글을 읽을 때 굶거나 극도로 제한하는 다이어트는 하지 않지만 평소에 폭식하지 않고 소량의 음식을 천천히 먹는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어서 주말이 지나면 주중에 참았던 간식거리들을 잔뜩 먹으면서 너무 배가 부르고 몸이 무거워 남자 친구에게 매우 진지한 얼굴로 기필코 다음 주부터는'소량의 음식을 천천히 먹어야겠다'라고 다짐하곤 했다. (개그가 아니었지만 개그가 되었다. 남자 친구는 내가 '소량의..'라는 말만 꺼내도 대폭소를 터뜨린다.) 와인을 조금씩 사 들이면서 특별한 날에는 와인을 조금씩 마셔보자고 했다. 나는 술맛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아한 입만 마셔도 그 맛을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다행히 내추럴 와인은 많이 강한 편은 아니라 천천히 조금씩만 음식과 함께하면 기분을 내기가 나쁘지 않았다. 나에게는 와인이 '술' 이라기보다는 예쁜 병에 든, 예쁜 잔에 따라 마시는 음료의 의미가 있고 특별한 날을 기념해 그날에 어울리는 귀여운 라벨의 병을 고르고, 그에 맞추어 요리하고, 그를 따서 잔에 따르는 순간의 묘미에서 의미가 있다. 와인을 고를 때 꼭 마음에 드는 것들로 골라 모아 두고 그날의 기분이나 특별한 이유에 맞추어 와인을 고르고, 조금 이른 시간부터 저녁을 준비해 해가 아직 지기 전에 시작하는 일요일의 저녁 식사를 좋아한다. 어떤 와인은 고를 때부터 특별한 날에 맞추어 고르기도 한다. 나는 와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몰라서 고르기에 더 좋을 때도 있다. 어떤 것은 더 많이 알아야 좋은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많이 알지 못해도 좋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 내가 조금 더 알게 된다면 그때 뭣도 모르고 그 와인을 왜 마셨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즐겁게 고르고 즐겁게 한 잔만 마시고 있다. 둘 다 술을 즐기지 않으니 한 번 오픈하면 반 병 이상이 남아 냉장고로 들어가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즐겁다.
나는 우리가 우리만의 세상에 사는 것이 좋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고, 무엇을 해야 즐겁고 행복한지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는 굳이 따지자면, 온전한 서로의 편 이기 때문에, 비교적 타인의 기준과 잣대로부터 자유로우며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 또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삶을 존중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즐기는 것을 하며 산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신기하다고, 특이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릴 때와 별 다를 것 없이 살아가고 있다. (바로 그 점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신기하다고 하는 점인 것 같다.) 나는 예쁜 것이 좋다. 무엇이든 예쁜 것이 좋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이 좋다. 예전에 내게 대학원을 권유했던 교수님은 내게 집에서 내가 철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싫어하실 것이라 하셨다. 타과 전공생이 열심히 철학 수업을 듣는 것이 희한하셨는지 교수님들은 나를 궁금해하셨고 내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시곤 했다. 철학이라는 과목은 세상에 대한 예쁜 것을 탐구하는 공부가 아니니 엄마가 싫어하시겠는데, 라며 너는 어떠하냐 물으셨던 것이 기억난다. 무엇이라도 붙잡고 달라 보이고 싶었던 시절에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특별하고 싶었던 시절에는 다른 친구들은 관심도 없었던 그 어려운 과목을 듣고, 잘하고 인정받는 것이 내게는 너무 절실했다. 나는 그때 내가 철학을 정말로 좋아하는 줄 알았다. 밤을 새도 피곤하지 않았고 책을 몇 권을 읽고 레포트를 써도 더 읽고 더 잘 쓰고 싶었다. 20대 때 썼던 블로그는 절반 이상이 철학 내용이다. 지금 보면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블로그를 보고도 몇 명의 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의 인연이 참 신기하다. 30대가 되면서 새롭게 이사 간 블로그도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쓰면 쓸수록 많이 달라진 듯해도 20대의 나와 여전히 이어지는 모습들이 겹쳐 보일 때가 있다. 남자 친구는 내게 가장 예쁘고 좋은 것만 보게 하고, 마음 편히 웃게 해 주는 것을 원한다고 늘 말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기억하는 남자 친구는 내 얼굴과 표정이 어린아이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때 행복해한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싶은 것을 와구와구 먹고는 배를 두드리며 다음 주엔 정말이지 '소량의 음식을..'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한다. 있어 보이는 침잠에는 관심이 멀어진 지 오래이다. 나는 예쁜 것을 보고, 예쁜 생각을 하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더 많이 보고 느끼며 살고 싶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정말이지, 소량의 음식을 천천히 먹는 프랑스식 식사를 정말로 실천에 옮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