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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Apr 22. 2023

작고 우아한 일상의 아름다움, 컨세바토아 데 헤미스피어

Conservatoire des Hémisphères


향기로운 것을 좋아한다.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 하나는 좋은 향이 나는 모든 것 이다. 그 향을 담는 무언가는 예쁠수록 좋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 거기에 글씨가 적혀 있다면, 특히 개인적인 문구가 들어간 무언가라면, 오- 다음달의 나 자신 , 알아서 결제하라.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프랑스의 차 브랜드, 컨세바토아 데 헤미스피어이다.



도대체 어디서 늘 살 것들을 발견하냐고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 편인데, 모르겠다. 대부분의 예쁜 것들이 다 그러하듯 정말 운명적으로 우연히 발견했다. 약간의 프랑스 병이 있는지라 프랑스 잡지 웹사이트를 자주 구경하기도 하고 인스타그램도 대부분 외국 계정들을 팔로우하다 보니, 새로운 것들을 구경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특히 프랑스에 거주하는 일본 여성들의 인스타그램을 발견하면 자주 구경을 가는데 거기서 유용한 것들(?)을 많이 발견한다. 아마 처음은 봉 마르셰의 홈페이지를 구경하다가 찾았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꽤나 유명해진 마린몽타구도, 한국으로 배송이 되지 않을 때 이메일을 보내 문의하니 흔쾌히 한국까지 배송을 해 주겠다고 하여 구매 했었는데 그 뒤로 한국으로 배송이 가능 해 진 것으로 보아...혹시나...? 한국으로 직배송 여부에 내가 조금이라도 일조를 한 것이 아닐까......약간의 과한 착각을 해 보기도 하는데, 아무튼. 마린 몽타구는 매우 안전하면서도 너무나 소중하고 예쁘게 포장되어 오고 배송도 꽤나 빠른 편인데 예쁜 그릇이나 컵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 할 일이 있다면 매우 좋은 선택이 될 만한 브랜드이다. 도자기 재질로 된 접시도 예쁘지만 실은 음식을 담아보면 매우 돋보이는 편은 아니고 대신 도자기 머그와 유리컵이 예뻐 여러개 구매해서 몇년 째 질리지 않고 잘 사용하고 있다. 업체마다 다르지만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부피감이 있는 제품의 경우 한국까지 직배송을 하면 40-45유로 정도로, 마린 몽타구도 배송비가 꽤 비싼 편 이었지만 아깝지 않은 배송상태와 속도, 특히 한달내내 이메일에 답 조차 제대로 기대하기 힘든 프랑스의 바캉스 기간이 가까웠을 때도 이메일 문의에 대한 답변이 매우 친절하고 빨랐고, 물건도 문제 없이 도착해 매우 감동했었다.



그래서 컨세바토아 데 헤미스피어는. 손꼽아 기다려 도착한 첫번째 상자부터 너무나 감동의 도가니였는데. 한껏 기대하고 받았음에도 너무나 만족했던 아름다운 포장과 함께 동봉된 크리스마스 엽서 (크리스마스가 아닌 때도 엽서는 동봉된다) , 그리고 기대 이상의 향기를 품은 차로 연이어 재주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매우 많은 종류의 차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녹차, 백차, 홍차, 황차, 우롱차, 보이차로 나뉘어지고 매우 차별화된 흥미로운 조합의 신선함이 특징이며 일단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꽃이나 말린 과일이 들어간 차는 눈으로만 아름답고 막상 차를 마셔보면 그 향이 기대 이하인 경우도 있는데 헤미스피어의 차는 아이디어도 그렇지만 그 맛도 상당히 신선하다. 소규모 생산의 힘인가. 윤리적인 최상급 재료를 고집해 차를 만들고 원하는 용량과 종류의 케이스를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원료로 만든 차 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차에 대한 조예가 없어도 (나도 없다)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신선한 향과 맛이 매우 훌륭하다. 헤미스피어의 차에대한 설명은 아름다우면서도 상세하고, 설명을 보는 것 만 으로도 얼른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프랑스어가 익숙치 않다면 구글에서 French to English 기능을 사용 해 보기를 추천한다. (한국어로는 상당히 외계어 스럽게 나오는 듯)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선택한 케이스에 글자를 새겨넣을 수 있다는 것인데, 금색 펜으로 쓰여져 배송된다. (주문 때 마다 글씨가 달라지는데 그것도 재미있는 한 포인트 인 듯) 나는 원하는 문구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 어울리는 차를 고르는데 특별한 날 이나 원하는 문구를 넣어 차를 주문하면 그 차와 함께 아름다운 기억도 매번 되살아나는 것 같아 소소하고 따뜻한 즐거움을 준다. 날이 좋은날 오전 햇살을 가득 담아 예쁜 찻잎이 우러나는 것을 구경하다가 향기로운 차 한 한잔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해가 지면서 늦은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 공기가 살짝 차가워질 때 쯤 문을 활짝 열고 차를 우려마시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도 매일 똑같은 하루에 기쁨을 더해준다. 최근 구매한 모든 차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굉장히 예쁘고 낭만적이라 거실에 두는 것 만으로도 행복을 더해주었다. 황동색 케이스는 150g이 들어가는 큰 사이즈와 50g 의 작은 사이즈, 종이 팩과 종이 케이스는 각 100g 이 들어간다. 가장 예쁜 것은 황동색의 작은 케이스인데, 현재 장기 품절 중 이다. 2월에 문의를 했을 때 4월이면 입고가 완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감감 무소식이다. 추가로 차를 구매하고 싶어 수 개월째 기다리는 중인데 곧 병이 날 것 같아 우선은 종이팩으로 구매를 해두고 나중에 추가 구매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헤미스피어의 차를 만날수록 나머지 차들이 더욱 궁금해진다. 주의 사항은 차는 관세 40%, 부가세 10%로 관.부가세율이 높으므로 $150을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라즈베리, 코코넛, 그리고 머랭이 조화로운 홍차 : ANNA PAVLOVA

러시아의 아름다운 전설적인 무용수 안나 파블로바의 이름을 딴 홍차로 차의 향을 발레에 대한 낭만과 사랑을 담아 기술한다. 얼어죽을 뻔 했던 러시아의 겨울을 뚫고 (무려 걸어서) 크리스마스 이브날 호두까기 공연을 보았던 마린스키 극장의 추억을 생각하며 골랐고, 함께 갔던 남자친구와 내 이름을 새겨 주문했다. 텁텁한 맛이나 향이 전혀 없는 깨끗한 홍차에 향기로운 장미잎과 부드러운 코코넛, 상큼한 베리, 그리고 지나치게 달지 않은 머랭이 조화를 해치지 않고 아름답게 어루어진다. 코코넛을 크게 즐기지 않아도 거슬리지 않는 부드러운 향이며 어느 향 하나 튀지 않는다. 지나치게 호화롭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화려한 아름다움이 이름과 참 잘 어울리는 차로 일요일 점심식사 후 디저트와 함께할 때 가장 잘 어울렸다.



자스민, 장미, 그리고 녹차 : THÉ DU CLOÎTRE

향긋한 자스민이 돋보이는 단정하고 깔끔한 뉘앙스가 세련된 녹차. 아무래도 자스민이 들어가다 보니 중국차 느낌이 강한데 훨씬 부드럽게 블렌딩된 느낌이다. 흔한 녹차 같지만 고급스러워 만족스러웠고 식사 후 특히 좋아 의외로 가장 빠르게 소진 되는 차. 아침에 마시면 좋을 것 같아 '작은 아침' 이라는 이름을 붙여 구매했는데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잘 살아있는 것 같다.



코코넛과 구운 아몬드의 루이보스 : LE BAIN DES NYMPHES

요정들의 목욕, 이라는 이름을 가진 루이보스 차. 나는 루이보스 차는 즐기는 편이 아닌데 헤미스피어를 만든 알리스 뷰허의 추천 인터뷰를 보고 구매했다. 매우 고급스러운 밝은 적갈색의 찻잎에 새하얀 아몬드 슬라이스와 코코넛이 주는 시각적 대비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인상적이다. 헤미스피어에서 구매한 차 중 가장 향이 진한편이고 평소 루이보스나 코코넛을 매우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너무 예쁜 차라 만족스러웠다. 밝은 오후의 기분을 북돋워주는 효과가 마음에 들었고 고급스러운 풍부함이 진부하지 않아 더 마음에 들었다. 점심 식사 후에 잘 어울린다.



라벤더, 카모마일, 엘더베리, 그리고 장미가 들어간 허브차 : CONVERSATION AU JARDIN

생일을 기념해 구입한 차. 여러가지 아름다운 색의 꽃잎과 말린 과일들이 들어가 작은 정원 하나를 보는 것 처럼 아름답다. 순수하고 섬세한, 편안한 향의 허브차 느낌이라 언제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맛과 향이고 누구나 좋아할 법한 예쁜 차. 푸른 빛의 꽃잎이 더해져 과하지 않으면서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고 카모마일의 향이 잘 어우러진다. 틴 케이스에 Happy Birthday 를 새겼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꽃, 살구 그리고 다양한 허브가 더해진 : BOUQUET TOMOJI

꽃다발 같은 허브차 중에서 고르고 싶었는데 살구향이 더해졌다. 화려한 노트인데 오히려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차. 여러가지 색의 꽃잎과 다양한 허브가 잘 어우러지면서도 버베나와 살구 향 때문인지 다른 꽃, 허브 차 보다 왠지 모르게 수수한 느낌. 위의 차가 귀족 아가씨 같다면 이것은 프랑스 시골의 예쁜 아가씨 같은 느낌이다.



오렌지, 오렌지 블로썸의 우롱차 : ULYSSE

한참 우롱차를 좋아할 때 구입했는데 오렌지 향이 아주 강한 우롱차이다. 돌돌말린 진한 찻잎 사이로 노란색 오렌지 블로썸 꽃잎이 들어가 있다. 찻잎을 평소보다 조금 적게 해서 묽게 마시는 것이 더 좋았는데 기존의 우롱에 재미를 더해주는 듯. 황동색 케이스가 아닌 종이 상자로 선택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왔던 붉은색 종이 케이스라 특별한 느낌.



야생 블랙베리, 그리고 백차와 녹차의 조화: GALATÉE

백차와 녹차가 섞여져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인데 더해진 과일의 향이 잘 어울린다. 베리와 파파야, 사과 향이 느껴지는데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느낌. 이 차를 선택한 이유는 차에 대한 설명 마지막 줄에 장난스러운 꿀 향이 첨가되었다고 해서, 인데 꿀을 무척 좋아하는데다 '장난스러운'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내 애칭을 이름으로 붙였다. (공주, 뭐 이런거 아니고 감당이 안되는 사고를 자꾸 친다는 의미의 애칭이다.) 정말로 살짝 꿀 향이 난다. 여름에 시나몬 스틱을 넣어 아이스티로 마시면 무척 예쁘고 잘 어울릴 것 같다.



견과류, 사과, 시나몬 향이 더해진 녹차와 우롱차 :HEMINGWAY

남자친구와 잘 어울릴 것 같아 선택했다. 여성스러운 뉘앙스의 나머지 차들과는 다르게 확실히 남성적이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어떤 것 하나가 나머지의 균형을 깨지 않는다. 우롱차에 쌉싸름한 녹차가 더해졌고, 사과와 오렌지 제스트, 그리고 시나몬의 향이 강하다. 헤밍웨이의 초상과 아주 잘 어울리는 맛과 향 이다. 무겁지 않지만 무게감이 있고 가을부터 겨울에 잘 어울릴 것 같다. 헤미스피어 차의 작명은 정말 천재적인듯. 남성적인 문체로 작품을 썼던 헤밍웨이가 마셨을 법 하다.



간혹 유명 브랜드의 차 중에 설명을 읽었을 때와 다르게 시음을 했을 때 실망하는 경우가 있어 차 그 자체 보다는 틴케이스를 모으는 재미로 차를 사기도 하는데 헤미스피어의 차는 차 맛이 정말 좋았다. 차를 우려 첫 입을 마시면 신선하고 가벼운 향기가 퍼지는 기분이 참 좋은데 가벼운 맛 이라서가 아니라 좋은 재료를 사용한 것에서 오는 청량감 같은 것이 있는 듯 하다. 대중적인 차 브랜드 중에는 마리아주 프레르를 가장 좋아한다. 긴자 마리아주 프레르 매장은 아주 멋있고 인상적이었는데 도쿄를 방문한다면 꼭 한번 들러볼 만하다. 마르코폴로가 아주 유명하고 인기있는 차 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차 중에서도 향기롭고 좋은 차들이 많았고 색이 다양한 작은 캔을 따로 구매해서 소량으로도 구매할 수 있다. 귀여운 주머니 모양의 모슬린 티백은 일반 티백보다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이라 기분 전환에 좋은 것 같다. 마리아주 프레르는 대체적으로 복합적이면서도 무게감 있는 고급미가 있는 것 같고, 헤미스피어의 차들은 대부분 밝고 향기로운 느낌. 향기롭고 신선하다. 그런데 이 브랜드의 매력은 단순한 향과 맛을 넘어선 다른 것에 있었다. 한 동안 마시다가 잊혀지고, 궁금해서 구매했다가 한 풀 꺾이며 유행처럼 소비되거나 단순히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험하기 위해서 헤미스피어의 차를 찾게 되었고, 그 경험이 나에게 개인적인 의미를 갖게 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동안 큰 애착이 생기면서 향기로운 헤미스피어의 차를 마시는 일이 생활속에 아름답게 스며들었다.


내가 경험 한 범위 내에서, 가장 흥미롭고 훌륭한 브랜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바로 헤미스피어이다. 구매해서 마셔 본 모든 차의 향이 섬세하며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향과 맛에 덤으로 헤미스피어를 경험하는 그 자체가 매우 특별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것이 효과적으로 전달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설립자이자 디렉터인 알리스 뷰허는 밀라노에서 패션 스타일링을 공부했고 불리 1803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내가 생각하는 마르고 세련되었고 예술적 감성이 뛰어난 프랑스 여자의 전형 같다. 차 하나 하나의 완성도도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름다운 매장의 인테리어와 브랜딩을 살펴보면 가히 천재가 아닐까 싶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서랍이 가득한 벽장에는 헤미스피어를 대표하는 황동색 케이스와 동일한 티 케이스들이 서랍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파리를 간다면 가장 처음으로 방문 하고싶은 곳이다. 나는 평소 향에 관련된 모든 물건의 노트를 상세히 살피는 편은 아니다. 관심이 가는 정도로만 찾아보고, 내가 경험하는 순간을 감각으로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컨세바토아 데 헤미스피어의 차들은 조금 달랐다. 나도 모르게 고르는 순간 아름다운 찻잎을 보면서 호기심에 구성과 차의 설명을 상세히 읽게 된다. 처음에는 차의 외관에 마음이 끌려 관심을 갖게되고, 찻잎의 아름다움에 호기심이 생기고, 그 이후에 선택한 차에 대한 설명을 하나 살펴보게 되는데 각 차의 상세페이지에는 어떤 음악과 함께 하면 좋을지, 그리고 차와 관련된 흥미로운 질문과 생각 거리들을 작게 노트로 더해두어 기대감이 증폭된다. 어떤 브랜드가 그 물건을 경험하는 방식에 이만큼의 섬세함을 담을 수 있를까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고객이 선택한 문구로 패키지 한 켠에 퍼스널라이즈 하는 것으로 단순한 관심이 호기심을, 호기심은 기대감을,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자기 자신과의 밀접한 유대감을 갖도록 마무리 한다는 점에서 이 브랜드를 소비하고 소유하는 경험 전반이 나에게는 비할 데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꽤 자주 다시 읽어본다. 똑같은 글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내가 몰랐던 내가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순간의 정적을 참지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딴에는 상대방을 위하느라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상대방에게 말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지우고 싶지 않아 내가 더 말을 많이 하는 습관이 있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지 않는 배려가 아니라 균형을 잘 잡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자칫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점점 더 내 이야기만 많이 하는 사람이 될까봐 주의하려고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함께있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 더 많이 듣고, 내 마음은 조금 더 정리하고 정돈해서 전달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쓰다보면 생각이 정리되어 좋았고, 그 글을 다시 읽어보면 내가 내 자신을 다시 한번 더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내 시선에서는 글에서 드러나는 괴팍하지만 순진한 모습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순수한 애정의 원형을 갈구하는 모습이, 모자라도 그래도 때 타지는 않은 것 같아 퍽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스럽다고 생각 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현실의 벽에 부딛힐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고 그것이 괴로울 때가 많다. 유약하고, 감정적이고, 쉽게 동요되고 불필요할 정도로 공감해서 결국은 내 마음을 내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회피하는 내 자신이 싫다.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을 키우지 말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감정에 압도되지 않도록 단계적으로 몇 가지 생각을 거치려고 한다.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나름대로 연습 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고 있는 것 같은데 유독 넘기 힘든 순간이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자신의 많은 부분이 엄마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직도 나이에 맞게 성장하지 못한 내 자신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함. 나는 모든 조건이 마련되어 있을 때만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좋은 학교에 다니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성과를 낼 때는 나는 내가 유능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 많은 것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실상 가장 무능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아주 어렵게 알게 되었고,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겨내고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런 삶의 방식이 더 고착화되어 있던 엄마는 화석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서 점점 엄마를 둘러싼 환경이 황폐해지는 것을 나는 지켜봐야만 했다. 엄마는 예전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사실 엄마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살고있는건지 모르겠다. 여전히 작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엄마를 보면, 잔뜩 들떠서 봄에 핀 들꽃 화분들을 한아름 골라 나를 기다리는 엄마를 보면, 우리 엄마는 대체 왜 저런걸까 기가 막힌다. 곧 죽어도 예쁘고, 향기로운 것이 좋은, 새로운 차 하나를 들이고는 몇 일을 날아가게 행복한 내가 결국 거기서 거기인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엄마' 라는 단어는 가벼울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엄마라는 말 위로 오랜 세월이 겹겹이 쌓여 내 어깨가 바스러질 것 같은 감정의 무게가 실린 오늘 날의 내가, 안쓰럽다. 엄마를 보면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눌러놓은 어린 날의 기억이, 너무 많이 변해버린 엄마를 보아내야만 하는 내 마음이, 그저 안되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내가 알던 엄마를 땅에 묻는 마음으로 살았다. 어려서 내가 알았던 엄마와, 커버린 내가 엄마라고 믿고있었던 사람은 이제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주 긴 시간 장례를 치르는 것 만 같았다. 나는 내가 알고있던 것 보다 훨씬 더 내 자신이 감정적으로 취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변해버린 엄마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 전까지 알던 엄마를 보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엄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나는 아직 엄마가 낯설다. 낯선 엄마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평소처럼 툭툭 말을 던지며 그 때마다 생살이 베이는 것 처럼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고 도대체 왜 이 마음은 무뎌지지도 않는 것인지, 이 유난스러운 청승맞음은 대체 언제 끝나는건가, 끝나기는 하는건가, 생각했다. 내가 지난 겨울에 사준 신을 신고 새 봄을 맞는 엄마의 뒷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엄마를 보는 마음이 예전처럼 감정적 이어서만은 안된다고, 지난 몇 년간 나를 계속해서 단련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유난히 괴로운 날들이 있고, 그런 날의 나를 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아직 잘 모르겠다. 강아지를 만나러 엄마네에 갔다가 엄마를 보고 온 다음 날은 내 마음이 시렸다가 굳었다가를 반복한다. 나는 늘 따뜻할 수 만은 없더라도 제발 이대로, 너무 뜨거워지지만은 말자고 다짐한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엄마를 따뜻하고 온전한 곳에 옮겨주고 싶었던 내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잘못된 판단이었던 걸까 고민했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은 털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것을 애증이라고 하던데, 이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지 않은 것은 왜 인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결론을 내지 말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그냥 지금처럼 엄마는 엄마인채로, 나는 나 인채로, 그대로 있어도 다시 예전처럼 평온하고 따뜻한 날들이 올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럴 수만 있다면, 바라게 된다. 아, 닮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것 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버겁다. 내가 변하지 않은채로 내 스스로에게 더 많은 시간을 허용해도 되는 것 일까 고민되는 날이 많다. 해답은 간단하면서도 그것이 내게는 참 어렵다.


한 달 전에 써 둔글을 마무리 하면서 되돌아보니 무뎌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는 것 들이 있었다. 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엄마를 땅에 묻는 것 같다는 생각, 내가 알던 엄마는 이미 죽고 없다는 생각보다 엄마는 엄마 인채로, 그리고 나는 나 인채로 서로의 시간에 맞게 흘러가고 그 모습에 맞게 피고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푸르고 아름다웠던 날의 엄마도, 그리고 꽃이 지고 빈 가지가 남아있는 엄마도, 결국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보내야 하고, 묻어야 하는 것 보다 다시 그 가지에 새 순이 돋아나고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피고 지어도,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이 만큼의 시간이 지나서야 들기 시작한다. 남자친구는 내가 무뎌지지 않아서 안쓰러우면서도, 내가 무뎌지지 않는 사람이라서 좋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참 힘들다고 생각했었는데. 무뎌지지 않아도 되었다. 날마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한 마디 정도는 성장하는 순간이 생기는데, 모난 사람이 되지 말고 내 자신의 부족함을 둥글게 깎아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감정에 무뎌지는 것과 내가 둥글어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 이었고 그것이 삶의 온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


포기가 아니라 수용으로, 부정이 아니라 포용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빈 주전자가 아니라 향기로운 차가 담긴 따뜻한 찻 주전자 처럼. 그러니 상실된 것은 없는 것이고, 소멸 된 것도 없는 것이다. 슬퍼 할 이유가 조금은 덜어지는 순간이다.


이제는 예전만큼 슬퍼지지 않고 가끔씩은 가슴 속에 묻어둔 옛날의 엄마의 모습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의, 길고 풍성한 머리를 가진, 작고 마른 몸으로 피아노 건반을 만졌던, 수수한 아름다움을 즐겼던, 나에게 가장 곱고 좋은 것만을 주었던 젊은 날의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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