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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May 13. 2022

최고의 스타킹 - 월포드

20대 초, 중반에는 거의 매일 스타킹을 신었다. 짧은 검정 반바지나 치마를 가장 자주 입었고 검은색 스타킹은 없어서는 안되는 품목이었다. 20대 후반에는 또 열심히 스키니 진만 입고 다녔고 30대에 와서는 스트레이트 핏 바지를 열심히 입다가 요즘은 룰루레몬만 입고 다닌다. 겨울 코트를 정리하면서 보니 중간만 보면 똑같아 보이는 옷이 열 벌이 넘었다. 나는 좋아하는 것이 정확하다. 품목마다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고 주로 마음에 드는 한 가지를 여러 개 구매한다. 스키니진을 열심히 입던 시절에는 프레임데님을 열심히 입었는데 워싱마다 별반 차이가 없는 브랜드라 나만 아는 차이가 있는 똑같아 보이는 청바지가 열 벌이 넘는다. 스트레이트 핏 바지는 조셉의 기본 바지를 좋아한다. 같은 모델로 길이가 약간 다른 검은색 슬랙스만 네 벌이 있다. 요즘은 이런 식의 쇼핑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버릇이 어딜 가나, 늘 비슷한 것만 좋아한다. 다양한 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이 참 멋져 보이지만 나는 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산다. 예전에는 무언가 마음에 들면 그것을 여러 개 사는 것을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비슷한 것은 잘 사지 않으려고 하고 여러 개를 구매하는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템은 여전히 똑같은 것을 여러 개 구매한다. 새로운 것이 나왔는지, 다른 브랜드는 어떤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월포드 스타킹이다.



십몇 년 전 언젠가 어떤 잡지에서 월포드가 스타킹 중 최고라는 글을 읽고 단순 호기심에 구매했다. 1950년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한 월포드는 중고 미국제 면 조직기를 이용해 스타킹 생산에 맞도록 맞춤 제작하여 최초로 가공 폴리아미드 섬유를 이용한 스타킹을 만들어냈고 봉제선이 없는 스타킹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무슨 스타킹이 7만 원 돈인가 놀랬었지만 비닐을 뜯어 발을 넣어보는 순간 와, 세상에 이런 느낌이 있다니, 아직 그 느낌이 기억난다. 월포드의 촉감은 룰루레몬 얼라인의 버터 질감보다 훨씬 관능적이다. 내 다리가 3센티는 길어지고 둘레가 1센티는 줄어드는 기분을 선사한다. 월포드를 신으면 다리가 훨씬 더 날씬해 보인다는데 아마 시각적 효과보다는 신을 때부터 남다른 이 느낌의 덕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월포드의 끝내주는 감촉은 존재하는 그 어떤 소재의 옷보다도 압도적이다. 한번 신으면 다시는 다른 스타킹은 신을 수 없다.



가장 많이 신는 월포드의 인디비주얼 10 데니아


스타킹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저만한 고가의 스타킹은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더 고가의 스타킹도 한 번 신고 나면 내가 허물을 벗은 것인가 생각이 들게 늘어져 두 번 신기 싫은 스타킹도 있다. 월포드는 비싸다. 그러나 절대로 비싸지 않다. 월포드는 가심비가 아니라 가성비로 따져도 정말 좋은 제품이었다. 스타킹으로서 구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모든 것을 갖춘 제품이 바로 월포드 이다. 부드러운 탄성이 느껴지는 스타킹의 유연한 조직 덕분에 아무리 오래 신어도 착용 후 결코 늘어나지 않으며 아무리 여러 번 세탁해도 변형되지 않는다. 실수로 약간 올이 틔었을 때도 조심해서 십자 모양으로 조직을 만져주면 복원된다. 내가 많이 사 모은 탓도 있었지만 너무 오래갔기 때문에 서랍 하나로 넘쳐 두 개에 나누어 보관해야 할 지경이었다.



매우 보수적인 편이었던 나는 원래 불투명한 벨벳과 새틴 터치 스타킹을 즐겨 신었다. 스타킹의 두꺼운 정도는 데니아 로 나타내는데 데니아 수가 높을수록 불투명해진다. 벨벳은 66 데니아, 새틴 터치는 50 데니아를 즐겨 신었다. 벨벳은 새틴보다 광택이 덜 하고 보송한 느낌이고 새틴 터치는 미세한 광택이 느껴진다. 새틴터치는 1988 년에 만들어진 제품인데 무려 삼십 년 전 이런 광택감을 의도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둘 모두 가을, 겨울에 적합한 정도로 가장 처음 구매하고 가장 많이 사 신은 모델이다. 캐시미어와 실크가 섞인 모델도 있지만 벨벳이나 새틴처럼 열 개씩 사서 신기에는 가격 부담이 있어 결국 손이 자주 가는 것은 저 두 가지 모델이었다. 캐시미어가 아니라도 감촉은 매우 좋고 캐시미어가 더 많이 따뜻한 것은 아니라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더 날씬해 보이는 것을 신게 된다. 그러다 2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수녀원에서 나온 것 같이 굴지 말고 과한 패션도 시도해 봐야 한다며 친한 언니가 ‘유리 스타킹’ 이러는 것을 선물해 주었다. 언니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언니가 골라주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감 없이 곧잘 받아들였고 유리 스타킹에 높은 구두를 신고 언니를 만나러 가다 십 분 만에 스타킹에 올이 나가 급히 다시 사 신어야 했다. 세상에. 바람만 스쳐도 올이 나가는 스타킹이라니. 편의점에서 다시 산 스타킹은 사 신는 과정에서 또 올이 나가버렸고 (두꺼운 스타킹만 신던 나는 스타킹이 손가락만 닿아도 올이 나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결국 백화점으로 뛰어가 생애 처음으로 10데니아 스타킹을 구매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월포드 이외의 스타킹은 손도 대지 않는다. 월포드를 신던 습관으로 신어보니 신는 즉시 올이 나가고 잠시 한번 발 한 짝만 넣었음에도 흐물흐물해진 스타킹을 보니 왜 월포드를 사 신어야 하는지 정말로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10데니아의 퓨어나 인디비주얼 라인을 가장 많이 사 신고 보수적인 자리에는 20 데니아를 주로 신는다. 퓨어와 인디비주얼은 큰 차이가 없고 퓨어가 비교적 최근에 출시된 라인이다.



월포드는 크게 패턴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면 된다. 나는 옷을 갖추어 입는 경우 전부 색상을 하나로 맞추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검은색과 남색만 구매해 신는다. 스타킹은 얼핏 보면 다 검은색 같아 뒷면에 있는 숫자로 보면 찾기가 편한데 검정은 7005, 남색은 5280이다. 월포드의 패턴 스타킹은 매우 다양하고 세련되었다. 다만 패턴 스타킹은 월포드의 문제라기 보다 그 자체가 잘못 매치하면 무지 스타킹보다 부해 보이고 잘못하면 나이 들어 보일 수 있다. 옷이나 소품 모두 장식이 거의 없는 디자인을 선호하는데 처음 월포드에 빠졌을 때는 패턴 스타킹도 어지간히 사들였고 아무래도 눈에 띄는 편이다 보니 국내에서는 신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패턴 스타킹은 플랫보다는 힐에 더 잘 어울리는데 이미 큰 키에 패턴 스타킹을 신고 높은 구두까지 신으면 모두가 나를 쳐다봐주기를 바라는 사람 같아 보여 신을 일이 많지 않았다. 대신 해외에 나가면 저녁 식사를 할 때나 공연을 보러 갈 때 좋은 포인트가 되는 의상의 마무리가 되었다. 좋은 자리에 갈 때는 장식 없는 적당한 길이의 검정 원피스에 패턴 스타킹을 신으면 적당히 감각적이고 적당히 세련되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욕심이 있고 허영심도 있지만 결국 나는 가장  만들어진 것을 좋아한다. 좋은 물건은  기능에 충실하고 사용하는 사람의 생활에 좋은 변화를 더해준다. 잠시 잠깐  허영을 채워주었다가 금방 싫증이 나는 것은 좋은 물건이 아니다. 좋지 않은 물건은 좋아하며 사용할 수가 없다. 며칠  친구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만남의 절반은 찌푸린 얼굴로 너무 싫다는 말을 수십  내뱉고 있었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한참 생각을 했다. 나라면 그런 태도의 사람과 오전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까 반성했고 능숙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너그럽지고 못한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사실 일전의  때문에  약속을 미루고 싶었던 탓도 조금은 있었다. 웃는 얼굴로 만나기에는 감정이 상했고 도저히 타협이 되지 않는 지점이 계속 신경 쓰였는데 아무렇지 않은  연기를 하자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자신이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닌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은 둥근 사람이면 좋겠지만 나는 그렇지를 못하다. 그래도 나는 좋은 물건을 골라서 그를 아끼며 곱게 사용하고  자체가 즐거운, 이것저것 기웃거리기 보다 선택한 물건 하나에만 괴팍하게 애정을 쏟는 내가 좋다. 누가 봐도 쟤는  색을 좋아하고, 저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보이는 성격대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게 친구를 귀하게 대하고 아끼며 충실하고 충직하게 위해주는 관계를 원한다. 아무 물건에게나 그런 애착을 쏟지 않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금은 슬프다. 물건은 고르더라도 사람은 고르고 싶지 않은데 그러지 않으니 자꾸 괴로워지는 때가 생긴다. 너그럽지 못하다면 앞에서는 웃고 속마음은 뒤로 밀어두면  일인데 그것조차 잘되지 않으니  나이 먹고도 아직 친구를 사귀는 법이 어렵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과는 그들과  지내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가 않다.  사람들은 함께하는 순간뿐 아니라 잠시 잠깐 얼굴만 떠올려 보아도 삶에  힘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들이다. 나는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인생의  벗을 얻었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사람과 함께하는 사소한 순간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나는 마음이  변하지 사람이라  우정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갑자기  사람의 인생에  변화가 생겼다. 상황이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의 나는 너무 순진했다. 상황은  사람을 변하게 했고  상황이  마음도 변하게 했다. 가장 외롭고 처참했던 그때  친구가 카레가 먹고 싶다는  말에 냄비   가득 카레를 끓여 생전 처음 보는 미니 돈까스에 소화가  되라고 매실액까지 챙겨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나도 저런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카레가 먹고 싶다고 하면 카레는 무엇과 먹어야  맛있는지, 먹고  다음에 소화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챙겨주는 그런 친구. 나는 좋은 사람들에게 괴팍하도록 충직한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웬만한 사람과 웬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 소중한 친구에게는 무엇이라도  덮어주고 덮어줄 것도 없이  좋다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좋지 않은 사람들과도  지내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어른다운 행동이겠지만 아직은 수행이 많이 모자란듯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월포드 스타킹 같은  친구들. 스타킹도 영원히 월포드,  친구들도 영원히  가장 소중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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