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최후의 공
1953년 6월,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양측의 눈치싸움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강경책이 실행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공산군은 휴전협정의 체결을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공산군은 휴전협정을 뒤로 미루면서, 추가적으로 국군에게 대규모 피해를 입히면서 휴전협정에서 다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중공군은 대규모 병력을 결집시키고, 타격목표를 오로지 국군 부대에만 집중하여 투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국군은 무려 자신의 4배가 넘어가는 규모의 공세에 노출되었습니다. 국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금성천을 빼앗기고 후방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폭우가 몰려와 중공군의 기세가 주춤한 사이, 국군 제2군단을 주축으로 역습이 시도되었습니다. 이 역습으로 비록 최초의 위치까지 되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주요 목표인 금성천 인근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중공군은 비록 금성천 북부의 주요 고지군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처음 목표로 했던 1만여명 이상의 국군 피해를 입히는데에도, 화천 지역까지의 진출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