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벌어진 해군 장교들의 총리 암살 작전
1932년 5월 15일, 일요일을 맞은 도쿄 시내는 북적이는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화창한 날씨 속 평화로운 시내의 모습은, 잠시 뒤 벌어질 아수라장과는 전혀 딴판이었지요.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지는 시각, 한 무리의 사내들이 택시에서 내린 뒤, 일제히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해군 제복을 입은 자도 있었고, 육군 사관후보생 제복을 입은 청년도 있었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이들은 순식간에 어딘가를 향해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총리가 살고있는 총리관저(総理官邸)였습니다.
무척이나 대담하게도, 총리 관저에 침입한 이 해군 장교들의 목표는 내각총리대신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를 찾아 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해군 장교들은, 이누카이 총리대신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머리에 대고 권총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권총은 불발되었고, 순간 어색한 정적이 관저를 감쌌습니다. 길고도 짧은 정적을 깬 것은 이누카이 총리였습니다.
“총은 언제든지 쏠 수 있지만, 먼저 자네들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네.”
늙고 연로한 총리의 대담하고 침착한 대응에, 압도되어 버린 해군 장교들은 얼떨결에 응접실로 안내되었습니다. 이누카이 총리는 해군 장교들을 응접실에 앉힌 뒤, 태연하게 담배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벗지 않고 뛰어들어온 청년 해군 장교들을 향해 ‘신발을 벗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했습니다. 경험 많은 노련한 정객인 이누카이 총리에 의해, 지금까지는 해군 장교들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모른 채 이 어색한 상황 속으로 갑자기 뛰어들어온 4명의 후속조가 응접실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이미 총리를 암살했어야 할 상황으로 알고 돌입한 후속조는 눈앞의 풍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진입했던 거사 동지들이 총리와 함께 다소곳이 응접실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었죠. 이를 본 후속조는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이야기하려는 총리를 향해 외쳤습니다.
“문답무용! 쏴라!(問答無用、撃て!)”
날카로운 총격음이 일요일 오후의 평화로움을 깨뜨렸고, 피투성이가 된 총리를 본 해군 장교들은 즉각 현장에서 이탈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하녀가 달려와 총리의 상태를 확인했고, 놀랍게도 이누카이 총리를 살아있었습니다. 얼굴과 몸에 3발의 총탄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하녀를 향해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그 젊은이들, 다시 찾아서 불러와. 들려줄 말이 있어.”
총리는 그 이후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고, 외출했던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즉각 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오후 6시 40분, 의료진은 ‘몸에 박힌 총알은 총 3 발이고, 1발은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그의 상태를 알렸습니다. 자신의 침대 곁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가족들을 향해, 이누카이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9발 중 3발만 맞췄다니. 군대의 훈련상태가 아주 엉망이구먼.”
이런 의연한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누카이 총리의 상태는 시시각각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날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이 5.15 사건(五·一五事件)은, 백주 대낮에 일국의 총리가, 자신의 관저에서 자국의 해군 장교들에게 암살을 당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사실 당시 일본에서 5.15 사건과 같은 총리 암살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마지막도 아니었구요) 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당시 일본의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부터 형성되어 오던 일본의 정치 시스템,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거대한 담론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으니, 여기선 독자분들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주요 사건들을 위주로 짚어보려고 합니다. 시간 순서를 거꾸로, 마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 첫 번째 단추는, 사건 발생 2년 전인 1930년의 ‘런던 해군 군축조약(London Naval Treaty)’의 체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30년, 영국 런던에서는 총 5개국의 대표단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참가국은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였습니다. 세계 해군력 TOP 5인 이 나라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불어온 경제위기와 군축(軍縮)의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해군력에 대한 상호 견제를 위해 런던에 모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함대 건설을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국가 재정이 투입되어야 했거든요. 1차 세계대전 이후 불어온 경제위기는 이러한 거대한 해군력의 건설과 유지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고, 이에 따라 “우리 서로 일정 비율 이상으로는 해군력을 가지지 말자!”는 의도로 해군에 대한 군축 조약을 맺기 위해 모인 것이었지요. 런던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1차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조약은 첫 단추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흔히들 국제정치를 강대국 위주로 돌아가는 힘의 논리로 바라보곤 합니다. 이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또한 전형적인 그 논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해군 강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은, 떠오르는 신흥 해군 강국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 ‘보조함의 총 보유량’ 제한하려고 했지요. 즉, ‘다른 나라들이 보조함을 자신들(미국, 영국) 이상으로 가지지 못하게’ 하려는 조약이었지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이 부분에 반발하여 체결에 동참하지 않자, 조약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영/미와 일본의 합의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대해서도 ‘당연히’ 해군력을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일본 대표단은, 출국하기 전부터 협정체결의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습니다. ① 보조함은 미국 보유량의 70%를 가질 수 해줄 것과, ② 8인치 함포를 장착한 대형 순양함도 미국 보유량의 70%를 가질게 해줄 것, 그리고 ③ 잠수함의 보유량은 7만 8천 톤을 유지하게 해 줄 것. 이 3가지였습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일본 입장에선 미국 해군력의 70%을 최소한으로 보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이를 순순히 허락할리는 없었지요.
미국 와 영국, 그리고 일본은 긴 회담을 이어나갔고 결국 1차 합의안을 도출했습니다. 가벼운 경(輕) 순양함과 구축함에 대해선 70% 보유를 허락하나, 비교적 대형인 중(重) 순양함 보유량은 60%만 허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총비율을 더해 계산한다면 일본은 미국에 비해 총 69.75%의 해군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초 일본이 희망했던 70%에서 불과 0.025%만 깎인 나름대로(?) 목표를 달성했다고 본 것이지요. 일본 대표단은 이 타협안을 받아 들고 ‘69.75%로 협정 체결해도 될까요?’하고 일본 본국에 이를 문의했고, 정부가 협정을 체결할 것을 지시하자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런던 해군 군축조약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체결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해군, 그중에서도 특히 해군 군령부(軍令部)가 이에 대해 조약 체결의 전면 무효를 주장하며 나서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해군 군령부는 중순양함의 보유 비율을 60%밖에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면서 정부를 상대로 엄청난 반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군령부 총장인 가토 칸지(加藤寛治) 제독은 조약 체결에 반발해 사임해 버리고, 야당(野黨)이었던 정우회(政友會)는 이 기회를 노려 여당(與黨)인 민정당(民政黨)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우회가 논리로 삼은 것은 단순한 조약 내용의 미흡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정우회는 이 문제를 ‘민정당이 감히 천황의 통수권(統帥權)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나왔는데,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대통령을 '국군 통수권자'라고 부르곤 합니다. 한 나라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인 통수권은, 대통령 같은 선출권력이 가지고 있는 군사 권한입니다. 그리고 그 군사 권한은, 쉽게 군정(軍政)과 군령(軍令), 2가지로 나눠지게 돼요. '군정'은 군에 대한 인사나 보급 같은, 조직관리를 위한 행정권한을 뜻합니다. 그게 반해 '군령'은, 군정을 통해 건설/유지된 부대에 대한 실제 작전 권한을 뜻하지요. 거칠게 표현하면, 군정권을 통해 군을 건설/유지/보수를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군대를 실제로 활용해 작전/전투를 벌이는 권한이 군령권입니다. 그리고 보통 이 군령과 군정은, 헌법을 통해 통수권자에게 부여되어 있지요.
그런데, 당시 일본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입헌군주제라는 틀에서 바라보았을 때, 천황의 아래에 있는 내각총리대신(총리)이 군령과 군정을 모두 쥐고 있는 통수권자가 되어야 하는 게 맞겠지요. 그러나, 당시 일본의 헌법은 한 가지 틈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총리에게는 군정권밖에는 없었습니다. 총리의 휘하에 있는 육군성과 해군성 모두 군정권만을 행사하는 기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럼, 군령권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로 천황에게 있었습니다. 천황의 직속으로, 육군은 '육군 참모본부'를, 해군은 '해군 군령부'라는 기구를 각각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감시나 통제를 받지도 않고, 오로지 천황의 직속으로 존재했습니다.
해군의 내부에서도 갈등은 심각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해군대신(海軍大臣, 해군부 장관과 같은 직책)의 지휘를 받는 해군성을 중심으로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조약파(條約派)와, 군령부 총장의 지휘를 받는 해군 군령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함대파(艦隊派)'로 나뉜 채, 해군 내부에서도 극단적인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야당이었던 정우회는 함대파인 해군 군령부의 편을 들면서 정부를 공격한 것이었던 것이지요. 군에 관련된 문제는 천황이 가진 '신성한 통수권'에 대한 문제인데, 그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외국과 협정을 체결한 정부의 행동은 위헌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정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협정은 해군력의 건설과 유지, 편제에 대한 문제이니 군령이 아니라 군정의 문제다!'라고 주장했으나, 이미 사태를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이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로 뿌리 깊게 박혀있던 '독립된 통수권'은 어느새 국가적 문제로까지 커져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미 조약의 내용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없어져버린 지 오래였지요. 그리고, 그로 인한 폭주의 전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조약이 체결된 지 반년이 조금 지난 1930년 11월 14일,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오카야마(岡山)에서 시행되는 훈련 참관을 위한 고베(神戸市)행 특급열차를 타기 위해, 당시 총리였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가 도쿄역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8시 58분, 그가 특급열차 츠바메(燕)의 1호차를 향해 4버 플랫폼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앞에 갑자기 달려든 한 청년이 그의 복부를 향해 지근거리에서 총을 발사했습니다. 천황 폐하의 신성한 통수권을 침범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총격은 그의 복부와 골반을 망가뜨렸지만, 그의 의식은 또렷했습니다. 암살범을 잡기 위한 소란과 더불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행원들에게 "괜찮다,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진정시켰습니다. 극도의 흥분 탓인지, 총리를 그다지 통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총탄을 맞은 순간 '아, 당했구먼. 그래도 죽기엔 아직 조금 빠른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고 합니다. 이후 하마구치 총리는 역장실로 옮겨졌고, 긴급출동한 의사에 의해 현장에서 긴급 수혈을 받았습니다. 이후 상태가 안정되자 도쿄대 병원으로 옮겨져 장의 30%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마구치 총리는 이후 병원에서 퇴원하여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상처가 덧나 악화되면서 건강은 악화되어 갔습니다. 결국 1931년 4월 14일, 총리직을 유지할 수 없었던 그의 내각은 총사퇴, 같은 민정당 소속의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 礼次郎)를 총리로 하는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마구치 전 총리는 4개월 뒤인 8월 26일, 총격 테러의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2차 와카쓰키 내각은 전 총리인 하마구치와 같이 전쟁에 반대하고, 군축을 주장하는 정책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나 '통수권의 독립'을 주장하며 정부에 일일이 간섭하는 군부와, 그것을 이용해 정치적 공세를 지속하는 야당 정우회의 움직임 속에서, 정부는 점차 그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총리였던 와카쓰키 그 자신이, 1930년의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일본 대표로 직접 서명을 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와카쓰키 총리는 그 스스로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야당과 군부에게 더욱 강력한 정치적 공세를 펼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의 자작극으로 인해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벌어지고, 통제 불가능한 군부의 폭주와 야당의 거세어지는 정치공세 속에서 구심점을 잃은 와카쓰키 내각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1931년 12월 13일에 결국 총사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우회의 이누카이 쓰요시(!)가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이누카이는 정우회의 리더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체결을 반대하는 해군의 반발을 도우며 여당과 정부를 공격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총리가 된 이후에는, 그 자신도 군부를 통제하고 전쟁을 피하며 대공황을 맞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책에 집중했지요. 이는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순 있었어도, 군부의 불만을 잠재울 순 없던 겁니다. 그로 인해 한때는 정치적 동지(?)였던 해군 장교단의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지요. 군부의 불만을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그에게 내려진 일말의 업보였습니다.
해군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원로들은 천황에게 새로운 총리 후보로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前 제독을 추천했습니다. 해군, 나아가 군부를 잘 통제하라는 의도가 담긴 인사였습니다. 한국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한 번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일 텐데요, 사이토는 제5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문화통치를 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군부에 대한 새로운 통제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육군 내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눈발이 날리는 도쿄 시내에서, 수상한 부대가 시내를 점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