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에 대해서 다들 잘 알고 계신가요? 주코프 장군은 소련군의 장군으로, 아무래도 영미권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는 생소한 장군일 수도 있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맥아더나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등 영미권의 장성들의 일화나 스토리가 더 익숙하기도 하구요!
그러나 거대한 2차 세계대전 속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가장 치열했던 전장을 꼽으라면, 그건 아마도 나치 독일과 소련이 맞붙은 '독소전쟁(1941~1945)'일 것입니다. 양측 모두 합쳐 수백만의 군인들이 수백 킬로미터의 전선에 퍼져 각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전투를 넘어서서, 지는 쪽이 완전한 인종적 절멸을 당한다는 프로파간다에 의해 벌어지는, 일종의 '캐삭빵'과도 마찬가지였지요.
오늘 소개드릴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장군은, 소련군의 지휘관으로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일구는데 일조한 장군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제정 러시아의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 군대에 지원하여 기병장교로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주코프를 포함한 다수의 붉은 군대 장교들에게 기동전의 기초적 사상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기도 합니다.
이후 주코프는 전간기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나갔고,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이후 일본과의 전면적인 국경분쟁이었던 '할힌골 전투'(노몬한 전투라고도 하지요)에서 말 그대로 일본군을 일방적으로 뚜드려 패면서, 대장으로 진급하는 개인적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사족으로, 물론 주코프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당시 전근대적인 군대에 머물러있던 일본 육군의 한계이기도 했지만요.)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전면적으로 소련을 침공하게 되었고, 주코프도 야전지휘관과 고위 지휘관을 넘나들면서 각지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그 현장에는 모두 주코프가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게 성공적으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결국 승리를 거두었지요)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다시피, 이름만 들어도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거대한 전투들을 모두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대단함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전쟁이 막바지로 향하던 1945년 봄, 주코프의 그의 군대는 베를린을 향해 마지막 진격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군대가 베를린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젤로' 지역의 고지를 넘어서야만 했습니다. 물론 독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여기에 약 10만여 명으로 박박 긁어모아 필사적인 방어선을 구축해 둔 상태였지요. 주코프는 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격준비사격, 그리고 탐조등을 대대적으로 사용하는 창의적 방법을 도입하지만, 이는 오히려 전진하는 소련군의 시야를 가리면서 아쉬운 결과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탐조등을 독일군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고, 소련군은 이 방어선을 뚫어내기 위해서 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스탈린에게 독촉전화를 받고, 동료인 이반 코네프 장군에게 베를린 입성의 공을 빼앗길뻔한 그의 조급함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쟁수행은 눈부신 승리를 이끌었고, 결국 소련에서는 거의 영웅과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오히려 그의 정적들로 하여금 그를 공격할 빌미를 마련해 주었고, 그는 실각하고 맙니다.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엔 국방장관으로 복귀, 차후 핵전쟁에서의 소련군이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개혁을 지속하였으며, 유능한 군사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국방 장관 이후 물러난 뒤에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었지요.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승리를 견인하였던 소련군의 기동전 전문가, 주코프 장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