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유럽, 암스테르담에서
2달 치의 짐과 배낭, 크로스백을 이고 생명줄 같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서 아침에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내렸다. 태어나서 혼자 이렇게 멀리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게 처음이라 100일간 사전조사도 엄청 하고 또 했는데도 긴장되고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지만 막상 공항에 내리니 마음이 차분했다.
'비로소 시작이구나.'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당최 알 수 없는 시차의 미로를 나와 비몽사몽 온몸이 뻣뻣하고 퉁퉁 부었지만 영원히 남을 나의 20대 사진을 위해 풀 메이크업을 마친 뒤였다. 모든 계획을 완벽하게 다 세워왔지만 막상 공항에 내리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공항에 있는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정신이 없어서 커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홀짝이다가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누군가 마돈나 굿즈 가방을 메고 가는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캐리어도 내팽개치고 두 유럽 아저씨를 불러 세워서 마돈나 팬이냐고 물어봤다. 정말 그렇다고 했다. 게월과 플로리스라는 이름의 두 친구를 사귀었다. 두 분은 파리 공연에 가고 계시는 중이었는데 고맙게도 나에게 이런저런 정보도 알려주시고 SNS 친구도 맺고 사진도 찍었다. 그때부터 이 여정의 시작이 갑자기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찼다. 잠깐의 신기하고 아쉬웠던 만남을 뒤로하고 숙소로 이동했다.
사실 아주 호화로운 여행을 할 형편은 안 돼서 하루 이틀 묵을 이 도시에서는 어떤 호텔의 반지하 방에서 묵기로 했다. 반지하라고 해서 싸지도 않고 또 구하기도 쉽진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고 이러면 어떠하리.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돈나를 만나기 위해 항해하는 프리다호의 선장인걸.
그 모든 순간과 여정이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몽글몽글 피어나는 내 여행의 싹과는 다르게 공항에서 숙소를 찾아가는 것도 여러 번 헤맸다. 그래도 구글맵이 있기에 느려도 찾아갈 수 있었고, 공항에서 트램을 타고 또 중앙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오래되었지만 깨끗했던 건물이었는데 로비에는 귤과 커피, 꽃, 갤러리, 책이 아주 정갈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친절한 스텝에게 짐을 맡기고 폰델공원에 자전거를 타고 가보기로 했다.
도심에 이렇게 푸르고 큰 공원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부러웠다. 사람도, 강아지도 참 행복해 보였다. 서울에서도 이곳에서도 매 순간 흘려보내면 안 되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시간에 대한 강박 관념 때문에 늘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를 구속하곤 했었는데 어느새 숨이 쉬어 지고 몸도 마음도 말랑해져만 갔다.
폰델 공원에서 혼자, 난 외롭지 않았고 또 스스로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녹음이 지는 초록의 공원을 뒤로하고 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어떤 도시를 가던 시장이 가장 즐거운 것 같다. 그래서 시장을 꼭 가본다. 무얼 파는지도 궁금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가 더 궁금하다.
아주 맛있는 와플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는데 조그만 푸드트럭에 흰색 조리복을 갖춰 입은 빠티쉐가 계셨다. 깔끔하고 소박한 작은 가게였지만 갓 구운 와플과 커피의 맛은 절대 소박하지 않았다. 일주일간의 여독을 모두 잊게 할 만큼 몹시 맛있어서 하나를 더 사 먹고는 예쁜 네덜란드 장식이 그려진 통에 든 선물용 와플도 샀다. 그렇게 시장을 둘러보다가 모로코 상인이 파는 샌드위치와 쿠스쿠스 샐러드를 샀다. 모로코에 갈 계획이 있던 나는 그들이 왠지 반가웠다.
한 겨울 자전거로 하루종일 달리다 보니 춥고 무릎도 아파서 구글맵에 저장해 둔 완두콩 수프 집에서 뜨끈하게 속을 달래 보기로 했다. 그렇게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거리를 걸으며 각종 기념품과 튤립을 구경하다가 풍차 마그넷과 튤립 구근, 섹시한 이미지의 엽서 등을 사서 숙소로 향했다. 며칠간 비행하고 유럽에 온 첫날이니 너무 무리하지 않고 일찍 귀가하기로 했다.
잔잔한 강 위에 집들 사이로 윈도우 모니터에서 본 것 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돌아갈 숙소가 있는 것도, 내 몸 하나 먹이고 누울 수 있는 지금의 내가 된 것도 참 감사했다. 콜럼버스의 지도처럼 내 인생의 지도에도 점들이 연결되어 선이 되는 것 같았다.
모든 일들이 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게 마음속을 떠돌아다니는 설레고 신기한 밤이지만 내일 또 파리로 이동해야 하므로 달콤한 잠에 들기로 했다. 공허하고 슬펐던 내 마음속에 어느새 새로운 것들이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