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인문학
나는 치과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치과를 거의 가본 적이 없다. 젖니도 거의 집에서 실로 뽑았다. 잘 뽑히지 않았던 젖니는 학교 구강검진을 나왔던 치과의사가 검진하면서 뽑아주었다. 주사도 불에 달궈서 쓰던 때다. 구강검진 미러도 소독액에 3~4개를 넣어두고 그 자리에서 번갈아 가면서 꺼내서 쓰던 게 생각난다. 발치 기구도 마찬가지였다. 하여튼 고맙게도 나의 젖니는 치과를 한 번도 거치지 않고 다 뽑혔다. 문제는 사랑니였다. 17~18세쯤으로 기억한다. 사랑니가 너무 아파서 동네의 한 허름한 치과를 찾았다. 대기 환자가 하나도 없었고 원장실로 보이는 쪽에서는 TV 소리와 함께 뿌연 담배 연기가 스며 나왔다. 순간 잘못 찾아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곳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예쁜 누나가 어디가 아파서 왔냐며 물었고 사랑니가 아파서 뽑고 싶다고 이미 말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X-ray 사진도 찍지 않았다. 체어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과의사 선생님이 나왔다. 미러로 검사를 잠깐 하더니 오늘 뽑아주겠다며 마취 주사를 놨다. 좀 아프기는 했지만 아픈 것보다 손에 밴 담배 냄새가 더 역했다. 아플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도 잠시였다. 선생님은 금방 다시 나왔고 담배 냄새나는 손은 어느새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근데 웬걸 입을 벌리자마자 사랑니가 뽑혀 나왔다. 그 치과는 허름하고 담배 연기 자욱했던 치과가 아닌 사랑니 잘 뽑아주는 치과로 이미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나의 첫 치과 방문이 사랑니 때문이어서 그럴까? 이제는 나도 젊은 환자들 사랑니를 자주 뽑는 편이다. 구강외과 원장과 함께 개원하고 있어서 옆에서 많이 배운 것도 있지만 예전부터 사랑니 발치를 좋아했다. “앓던 이”를 뽑아주는 이 극적인 역할극에서 배제되기 싫었기 때문이랄까? 사랑니를 잘 뽑아주는 치과의사가 되고 싶은 어렴풋한 나의 치과 첫 방문 경험 때의 희망을 실천하고 싶기도 해서다.
● 모든 병에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사랑니가 아파서 뽑았던 것을 ‘부종과 염증으로 인한 통증’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나의 앓던 이를 너무 빨리 잘 뽑아주었던 ‘담배 냄새 자욱한 치과의 냄새나는 손’으로 기억한다. 이야기가 되어있는 것이다.
얼마 전 사랑니를 뽑아주었던 학생이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나는 그 환자와 마주했던 시간도 짧고 나눈 대화도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그 블로그에는 자그마치 세 편에 걸친 발치 이야기가 펼쳐져 있었다. 예약을 어떻게 했는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X-ray를 찍고 자기의 치아를 보면서 든 생각들, 마취 주사를 맞을 때의 느낌, 이를 뽑을 때 머릿속으로 상상한 기구의 다양한 모양들, 의사의 짧은 말들, 스케일링을 받을 때 치과위생사의 터치와 말들 등 그 짧은 치료의 과정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블로거라서 그렇지 대부분 환자도 이런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우리는 다양한 조연으로 나온다. 어떤 조연이 되느냐는 어떻게 연기를 하느냐에 달렸다.
● 질병은 삶 속에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질병을 가리키는 용어는 ‘disease(질병)’와 ‘illness(질환, 아픔)’인데 이 두 가지는 의미가 좀 다르다. ‘disease’는 일반적으로 생물학적인 질병을 가리키지만 ‘illness’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주관적인 느낌과 체험적 측면을 포함한다. 영어와는 다르게 우리나라 말 ‘병을 앓는다’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신체적 통증이나 정신적인 고통, 실존적 아픔까지도 모두 포괄한다.
최근 의과대학에서는 의료인문학 수업을 통해 실제로 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나 문학 작품을 활용하거나 모의 환자들과의 의사소통 훈련을 하는 것을 배운다. 질병이야기, 질환내러티브, 질병체험이야기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고 이런 텍스트들을 통칭하여 ‘질병체험서사(illness narrativ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narrative는 그 내용이 되는 이야기(story)뿐만 아니라 그것이 표현되는 형식을 뜻하는 담화(discourse)까지도 포괄하기 때문에 서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환자에게 질병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병리적 과정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특정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환자가 질병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들게 되고, 질병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는 것은 환자의 관점에서 질병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 질병이 아닌 환자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오래된 틀니를 사용하고 있는 환자가 자식과 함께 왔다. 마모가 심해진 틀니로 제대로 씹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틀니 보험 혜택을 받으려면 1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사실 관계를 말씀드렸더니 환자는 1년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함께 온 보호자는 한사코 새 틀니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실랑이 끝에 결국 새로 만들기로 했다. 보호자는 진료 후 따로 나에게 찾아와 환자가 말기 암이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치매가 있어서 본인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지 못 하고 있다고도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새 틀니를 해드려야 먼 저승길을 가실 때 식사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겠냐고 했다. 예전에는 돌아가시기 전에 새 틀니를 끼워드리고 싶다며 이처럼 찾아오는 분들이 꽤 있었다. 화장(火葬)을 많이 하는 문화로 바뀌면서 그런 경우가 줄어들었다. 치아가 하나도 없이 저승길을 떠나는 부모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던 때가 있었다. 틀니를 만들어 드리는 것으로 그 마음을 달랬던 시절이었다. 이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새 틀니를 만들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했다면 어땠을까?
환자의 삶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의학적 지식만을 나열하거나 무조건 적용하는 것은 효과적인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생의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의사는 환자가 잘 이해할 수 없는 과학적 언어를 구사하기 마련이다. 환자는 의사가 가진 생의학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일반인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언어 세계를 갖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신경학자이자 의사인 색스(O. Sacks)에 의하면 근대 이전의 의학에는 ‘이야기 전통’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병상에서 환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이를 진단과 치료의 근본으로 삼는 이야기 전통은 히포크라테스 이래 서양의학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은 근대 이전의 의학이 지녔던 이야기의 전통을 많이 잃어버렸다. 현대 의학에서는 자율성 존중이라는 원칙하에 환자들의 권리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음에도 오히려 의료 현장에서 환자들의 목소리는 사라지는 서사 포기 현상(narrative surrender)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 소외된 개인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것의 시작은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바쁜 시간에 귀찮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 환자를 우린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자본주의 의사의 한계다. 하지만 환자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하는 능력. 이를 통해 ‘공감’과 ‘지혜’를 갖춘 의료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환자의 이야기 속의 빌런이 되지 않기 위한 최소의 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