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해준 Jan 21. 2024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 전경린

네팔 여행 에세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날, 하얗게 부서지는 햇빛을 향해 기다란 개천을 따라 마냥 걸어가던 순간.

시간이 멈추고 영원한 어딘가를 향해 가는 듯한 걸음…

그것은 여행지에서 집으로 보낸 엽서의 스탬프처럼, 지난 시간 속에 각인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여성의 예민하고 섬세한 심리 묘사에 탁월하여 '귀기와 정념의 작가'로도 불린 전경린.

그녀는 삶에 지친 자신을 위해 네팔 여행을 결심한다.

버림받은 것에 가까운,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익명의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행지로서의 네팔은 히피의 나라답게, 무언가를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제약에서 굉장히 자유롭다.

드세게 경쟁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타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쏟는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

여유와 한가함을 지나 과거로 회귀하는 시간들...


의식의 압박이 느슨해지면, 억누르고 회피했던 것이 하나둘 찾아온다.

네팔에서 그녀가 만나는 카트만두 거리, 두버 광장의 사원, 포카라의 호수 풍경은 내 의식에 가라앉아 있던 희뿌연 기억과 정서를 뭍으로 끌어올린다.

20대의 나도 그녀와 같은 공간을 방황했지만, 기록하지 않은 장면들은 마음의 혼란과 시간 속에서 잊혀져 버렸다.

그 탈락된 기억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복원해 간다.


왜였을까.

비행기로 7시간이 걸리는 남서쪽의 타국에서, 내가 자란 80년대 한국에서의 유년기가 떠오른 것은.

카트만두 두버 광장의 중세 목조 건물 처마 밑에서, 땟국물 자욱한 옷을 입은 네팔 사람들과 앉아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고 있을 때였나.

그 광경, 그 익숙함은 마치 지난 생의 어딘가로 돌아간 듯 가슴이 욱신거리고 감전된 것 같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축원(祝願)을 위해 붉은 신두르 가루를 뿌려 놓은 신상이 자리한 사원은, 불교와 샤머니즘적인 힌두교가 뒤섞여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사원의 어둡고 오래된 마당으로 들어서니, 어린 시절 좁다란 시장 골목을 다닐 때처럼 구구구 비둘기들이 모이를 쪼다가 날아가고...

불현듯 누군가 낯익은 목소리로 어린 시절의 내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았다.



거리는 이미 캄캄했다.
손가락을 대면 흑연가루가 묻어 나올 것 같은 낯선 어둠이었다.
달려가는 자동차의 라이트가 비칠 때마다
언뜻언뜻 상가 거리의 윤곽이 드러났다가 사라져 갔다.
~
 밤은 비린내가 나도록 낯설고, 너무나 길었다.
- 25p


인도 네팔에서 밤이나 새벽에 새로운 도시에 떨어졌을 때였다.

동행 없이 배낭 하나만 걸머진 채, 잘 곳도 머물 곳도 정하지 않고 내렸을 때의 막막함.

나를 붙잡아둘 끈도, 보호막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그 쓸쓸함과 적막감이란.

전기 사정이 좋지 않고 개발이 덜 된 네팔과 인도의 밤은 더욱 칠흑처럼 검었다.

아무런 빛도 없이 가로막힌 어둠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변한 건 없고, 벽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건 그 어둠과 닮았다.


밤의 시간만이 아니라 모든 대상과 감각을, 그녀는 예민하게 포착한다.

입장료를 내고 보는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

그들의 삶에서 그녀는 가공할 공포와 서글픔을 느낀다.

유폐된 방, 네댓 살 된 작은 여자아이 혼자 잘려진 물소 머리 50구와 함께 아무런 말도,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피비린내 나는 공포의 밤은 그들의 삶에서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을까?

감금된 신으로 살다 버려진 일반인의 삶을, 여자아이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쿠마리였던 여성은 자폐적 유년기와 성녀(聖女)의 망상으로 대부분 불행해진다고 한다.

인간이 만든 여신들은 이토록 가학적인 관습의 피해자가 되고 만다.


한순간으로 충분한 것이 있다. 쿠마리 사원에 들어서는 것도 그런 일일 것이다. 한순간에 그 귀기가 고스란히 몸 안으로 들어와 버린다. - 36p


슬프고 아프고 서늘하고 그리운 카트만두.

네팔 한가운데 있는 도시를 떠나 이제 그녀는 포카라와 룸비니로 이동한다.

새로운 풍경, 사원, 세속, 사람들을 만나며, 한국에서의 자신과 삶과 가족을 떠올린다.

여행이란,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낯설게 보기 아닌가.

전업 작가인 그녀에게 글쓰기는 빠질 수 없는 고뇌이자 정체성이다.


글쓰기 앞에서 직면하는 공포는 삶에서 경험한 모든 공포에다
관념적인 공포까지 다 끌어 모아 합한 것처럼 막강하다.
여러 날 동안 노트북의 텅 빈 화면 앞에서,
커서가 깜박이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할 때, 전날 쓴 것을 모두 지워 버린 뒤에,
피가 마르듯 강박적이고 숨이 막히도록 직접적이며 물러설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완강한 공포에 사로잡히곤 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몇 퍼센트의 실패든, 늘 표현의 실패는 기정사실인 것이다.
- 79p
 

베스트셀러 작가가 글쓰기 앞에서 느끼는 공포는, 듣보 작가인 내가 느끼는 막막함이나 두려움과 다르지 않다.

마음에서 소용돌이치고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응어리들.

그 에너지를 언어로 끄집어 올려야 할 때의 강박은, '때가 되면 나오겠지요.' 출산을 미루는 산모에게 '어서 피와 살이 도는 창조물을 탄생시키라'고 배를 누르는 산파와도 같다.

그러나 뱃속의 천사가 태어나면, 벌겋고 쭈글쭈글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전경린 역시 몇 퍼센트냐의 차이일 뿐, '실패는 기정사실'이라 말하지 않는가?

내 안의 소중한 것이 완전하지 않은 형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을 나는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타협해야 한다.


   

저마다의 글은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심지어 여행하는 동안에도
나는 이 글이 내게 요구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객관화된 여정과 적정 수준의 내면 고백이 적당히 교차하는
도식적인 글을 써 내리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땐,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고 더욱 불가능해졌다.
내 속의 무언가가 저항하고 괴로워했다.
 나는 얼마나 말하고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
거리를 먼저 정해야 했다.
- 267p


하나의 글이 자신만의 생명력을 가져서 작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며, 작가의 머리와 손을 빌려 스스로 전개되어 나간다는 이야기.

여러 번 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신기하고 호기심이 이는 대목이다.

내가 쓰는 글들도 그럴까?

내 글이 내게 원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어쩌면 삶 자체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며, 우리를 통해 흘러가는 흐름이 아니었을까?


내 속의 영원한 것....
그건 동경이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희부연 길 끝을 향한
하염없는 응시가
어린 시절 내 의식의 전부이다.
그것은 어쩌면 앞이 보이지 않는
먼지 길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다.
건조하고, 아프고, 허무하고,
무용한 것들로 가득 차고,
또 텅 비었으며, 고요하고 먹먹한,
이 먼지 구름을 지나며
내가 느끼는 것,
상상하는 것, 한순간 섬광처럼
보였다 지워지는 것,
뒷모습도 없이 나와 결합하고
무너져 버리는 것들,
내 심장을 후벼 파
점막의 붉은 살점을
들고 나가 버리는 것들,
갓길에 허리를 꺾고 앉아 통곡하게 만드는 것...
-270p


이 책을 떠올릴 때마다, 저 멀리 막막하고 먼지가 이는 길을 따라 터덕터덕 걸어가는 어떤 사람의 장면이 그려진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글도 어린 시절 먼 길을 따라 걷던 기억에서 출발하였다.

나의 글도 모종의 요구를 하고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것을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네팔에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살고 있다.

그곳의 공기는 의식의 수면 아래 감춰져 있던 지난 생의 비밀을 슬며시 건드린다.

은빛 비늘과 같은 추억, 이미 이 세상에 없어서 꿈으로만 볼 수 있는 이의 흐릿한 형상, 목소리.

그들과의 마법 같았던 추억과 만남, 그런 이야기가 부지불식간에 떠오른다.

20년도 지났지만, 그 밀어(密語)는 가끔씩 되살아나 오랜 기억을 깨운다.


그렇게 네팔에서 온 편지는, 오늘도 내 의식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고 간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 정희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