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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영감이다 : 영감탐험일지(1)

당신의 예측 불가능한 영감의 여정, 리움미술관


영감탐험단의 첫 번째 탐험지는 리움미술관이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다양한 매체에서 ‘영감을 받기 좋은 공간’으로 추천한 곳이며 둘째, 작품 수가 많고 종류가 다양해 각자 채집한 영감을 비교하고 나누기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지리적 접근성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날 무료 관람이 가능한 상설전 M1(고미술)과 M2(현대미술)를 관람했다. (리움미술관 전시는 상설전과 기획전 전시로 나눠져 있다.)



['고미술관'에서 받은 영감]


바이런 킴, 고려청자 유약 #2(1996)

고미술관 입구에 위치한 작품부터 나의 이목을 끌었다. 도자기 유약을 캔버스에 칠한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작품에 매료된 이유는 '발상의 전환' 때문이었다. 도자기 유약은 도자기에 바르라고 있는 것인데 이를 캔버스에 칠하다니! 평면화된 유약은 미술관의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났으며 비췻빛은 더욱 우아해 보였다. (이 날 내가 느낀 감동을 사진에 그대로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고미술관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유형을 가리지 않고 전시되어있었다. 많은 작품들에 하나하나 경탄하며 발걸음을 쉽게 뗄 수 없었다. 그렇게 결말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책을 붙드는 심정으로 고미술관의 마지막 전시실로 이동했다.


고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



이곳에서 가장 감탄한 것은
휴게공간에 놓인 의자였다.

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을 댕강 잘라 그대로 얼린 것 같은 투명 유리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댄 손 위로 넘실대는 물결의 기운이 올라와 청량감이 느껴졌다. 워터 블록에 매료되어 전시를 보느라 지친 다리의 통증을 잊었다. 마치 차가운 계곡 물에 발을 담근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하고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유리가 이런 모양과 질감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과연 '미술계의 과학자'란 수식어가 붙은 작가의 작품다웠다. 다음 전시관에서는 또 얼마나 감동할 것들이 많을지 기대하며 중력의 계단을 따라 현대미술관으로 이동했다.


"맑은 물을 그대로 얼린 것 같은 유리의 느낌과 앉았을 때 느껴지는 시원한 감촉은 관람객들이 유리라는 오래된 재료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이끕니다."
 -  <워터 블록> 작품 설명 中



M1에서 M2로 이동하는 통로에서 만난 올리퍼 엘리아슨의 <중력의 계단>



['현대미술관'에서 받은 영감]


현대미술관은 다른 의미에서 감탄의 연속이었다. 고미술관에서 경계 내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맛봤다면, 현대미술관은 한계를 뛰어넘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는 예술가들의 끊임없는 시도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로 치환한 불가능성 중 나는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에 눈이 갔다.

아니쉬 카푸어는 용기 안에 액체 상태의 투명한 아크릴이 굳어가면서 갇힌 공기방울을 작품으로 내놓았다. 그가 포착한 인간이 잡을 수 없는 시간의 조각에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벽이라 생각한 것을 뛰어넘으려 시도해본 적이 있었나? 어떻게 하면 내 손에 잡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을지 노력했었나? 왜 방법을 찾지 않았지?'라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중략) 용기 안에 액체 상태의 아크릴을 붓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공기 방울을 작품으로 승화한 것입니다. 투명한 아크릴이 단단하게 굳어 가면서 그 안에 갇힌 공기 방울은 모호하면서도 신비로운 형상을 갖추게 되는데, 이는 흡사 원생동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막 태어나고 있는 미지의 생명체 같기도 합니다."

 -  <프로토프로토> 작품 설명 中



[자본이 영감인 이유]


‘자본이 영감이다’라고 말하면 너무 물질주의적일까?


리움에서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순서에 따라 이동하니 끼고 있던 디지털가이드 이어폰에서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일반적으로 오디오 가이드는 작품 순서에 맞게 특정 번호를 눌러야만 작동한다. 반면 리움의 디지털 가이드는 내가 어느 작품 앞에 있는지를 자동으로 인식해 관람 속도에 따라 작품 설명을 청취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디지털' 가이드란 설명에 맞게 모든 가이드마다 고화질 작품 사진과 작품 관련 배경 지식, 내레이션 풀 멘트까지 함께 제시해 이해를 높였다. 이렇게 많은 작품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거의 완벽한 해설이 최신 기계와 접목된 결과물을 무료로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었다. 이 디지털 가이드는 ‘이동하는 작품이자 내 손 안의 도슨트'였다.


고미술이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수채화 같다면 현대미술은 나에게 알쏭달쏭한 추상화와 같다. 고미술음 너무 익숙하기에 진가를 알아차리못했고, 현대미술은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표현하려고  건지답을 찾기 어려워 일부러 피했던 나이다. 그런데  디지털 가이드와 함께니 그저 스쳐 지나갔을 백자, 정병, 연적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있었고, 거리두기를 열심히 해왔던 현대미술 작품에도 바짝 다가갈  있었다.


똑똑하고 친절한 리움미술관의 디지털 가이드. 갤럭시 S21 Plus 기반 3세대 디지털 가이드으로 전시중인 모든 작품에 대한 해설을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제공한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장 작품을 대하는 리움의 자세였다. 나름 국내외 여러 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했었지만 모든 오랜 소장 작품을 낚싯줄로 고정해놓은 것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낚싯줄은 나에겐 '리움이 소장품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투영된 결정체'였다. 남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하고, 그에 맞는 최적의 기술을 접목해 상상한 대로 구현할  있다는  사실 자본의 힘이었다. 소장품을 내놓는 것에 초점을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을 여실히 고민했던 흔적이 드러나 기뻤다. 수많은 개발자, 엔지니어, 큐레이터, 디자이너들의 지식과 정성, 최신 기술, 그리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마르지 않는 자본이 결합된 결과 작품에 투영되어 내게   영감을 주었다. 마치 부유한 큰아버지가 ‘오늘은 내가   낼게!’해서 따라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미슐랭 3스타 최고급 코스요리를  없이 맛본 것만 같았다. (, 리움에선 물품보관함도 무료다!!)



[오늘의 영감 나눔]


내가 영감탐험단을 만들 때 가장 중점을 둔 것이 바로 영감 나눔을 하는 시간이다. 새롭고 재밌는 곳 방문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면 친구들이랑 가면 된다. 그러나 내가 시간을 들여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모은 건 나이, 직업, 성장과정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뿜어낼 관점의 다양성 때문이었다. (영감탐험단 탄생 비화는 이 글에서 확인하세요!)


리움미술관 관람이 끝나고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영감 나눔을 시작했다. 이날 모인 5명 중 1명이 나와 같이 ‘고려청자 유약’과 ‘워터 블록’을 오늘의 영감으로 꼽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온전한 휴식과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도 시간도 실체도 없는'을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두 개의 곡면 거울이 마주 보는 부분의 무한한 반사로 말 그대로 현기증 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이중 현기증’을 꼽았다.


영감탐험단원들이 뽑은 '오늘의 영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영감탐험단원 Y의 말이었다. 그녀는 약 천여 개의 크고 작은 유리구슬 중 일부가 투명하게 반사되어 자기 자신을 역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게 설계된 올리퍼 엘리아슨의 <당신의 예측 불가능한 여정>을 오늘의 영감으로 꼽았다.



"구슬들이 가까이서 보면 불규칙적인데 멀리서 보면 규칙성이 있더라고요. 이제까지 제 삶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어요.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마치 제 삶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참을 이 작품 앞에서 서성였어요."

- 영감탐험단원 Y의 말 -


Y의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난 그저 이 작품의 오색찬란한 유리구슬이 뿜어내는 빛이 예쁘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작품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지 의아해하며 지나갔다. (전시 마지막쯤에 놓인 작품이라 이때 난 다리가 좀 아프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작품을 보고도 이렇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니!


영감탐험단의 여정도 예측 불가능했다.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 나올지, 이들과의 조화는 어떨지 전혀 상상할  없었다. 모두가 다르다는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도 '영감을 찾는다' 예측가능성에 따라 하나로 모였고, 예측 가능하지만 한편으론 불가능한 여정에 함께했다. 이날 우리는 영감 나눔을 통해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른 것을 '오늘의 영감'으로 꼽고, 그에 대한 해석도 다르게 제시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영감탐험단'이란 이름으로 묶인 우리의 정체성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예측 불가능할 영감의 여정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기로 했다.


이렇게 영감탐험단의 첫 번째 여정이 끝났다.

다음 탐험지는 멤버들이 신청서에 적은 '영감탐험단에서 함께 방문하고 싶은 장소'로 꼽은 곳 중 하나로 정했다. 이 날 발견한 영감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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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탐험지에서 채집한 영감은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 사진 출처 : 작가 촬영본 및 리움 홈페이지(https://www.leeum.org/)

- 작품 설명 출처 : 리움 홈페이지(https://www.leeum.org/)

- 관련 글 : 영감탐험단 탄생 비화(나는 ‘영감탐험단장’입니다)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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