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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일깨우다 : 영감탐험일지(2)

기분 좋게 소리에 압도당하는 곳, 백지화리스닝룸


두 번째 영감탐험지는 '리스닝룸 백지화'이다. 이곳은 한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신청하는 음악을 하이파이 오디오로 청취하는 곳이다(네이버 설명 참조). 이 날의 계획은 각자가 골라온 음악을 함께 감상하고, 음악을 신청한 이유와 그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 곡과 그 이유]


모임 전, 오늘의 호스트인 영감탐험단원 D는 ‘나에게 영감/감동을 주었던 곡, 요즘 가장 즐겨 듣는 곡, 나만 알기 아까운 곡, 스토리가 있는 곡’을 사전에 선정하라는 가이드를 주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좋을까를 고민하다, 이왕 청음샵에 가는 김에 작정하고 고퀄리티 음질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는, 다양한 악기가 버무려진, 멜로디 한 음 한 음을 느낄 수 있는 곡을 고르자고 결심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 가이드에 딱 들어맞는 곡은 아니지만 - 다음 두 곡을 선택했다.

(* 영감탐험단에서는 월별로 돌아가며 탐험지와 영감 나눔터를 결정한다. 영감 탐험단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면 이곳을 클릭!)



1. Paganini - Caprice Nº 24


세상에서 가장 민감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려면 현의 마녀인 정경화의 음악이 제격이다 싶었다. 그래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연주곡을 찾았다. 그녀가 연주한 모든 곡들이 그녀의 고유함을 뽐내고 있었지만 왠지 조금 아쉬웠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를 떠올렸다. 정경화가 연주한 파가니니의 곡을 따라가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David Garret이 연주한 Caprice no.24를 건져냈다. 이 곡이라면 내가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 Astor Piazzola - Adios Nonino


세상에서 가장 예민한 소리를 골라냈으니, 이제는 가장 격정적인 곡을 꼽고 싶었다. 그러다 뜨거움과 정열의 상징인 탱고, 그중에서도 절절함의 절창인 아디오스 노니노를 듣자고 결심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제대로 탱고를 만난 후 한동안 이 곡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음원이 보편화된 이 시대에 굳이 그의 CD까지 구매하면서 말이다. 음악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백지화리스닝룸 소개]


백지화리스닝룸은 사실 접근성이 좋지 않다. 오래된 동네 골목 지하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 같다. 한 마디로 말해 백지화리스닝룸이 아니라면 굳이 이 부근에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문을 열었다. 적당한 좌석과 테이블이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줄까지 1인 소파가 있었고 맨 뒤 긴 테이블을 합해 대략 열 명 정도가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줄에 앉을 때마다 앉은 키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 의자의 높이도 소리를 담아내는 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보다.


출처 : 백지화 리스닝룸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baekjihwa/)


맨 앞자리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해당 곡을 신청한 사람의 자리다. 본인이 신청한 곡이 나오면 스피커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제일 먼저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 신청곡을 청취하는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원하는 곡을 포스트잇에 적어 신청하면 사장님이 틀어준다고 했다. 하지만 한 번에 여러 사람들이 음악을 신청하는 것을 감안하면 내가 신청한 곡이 반드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리스닝룸 곳곳은 알파벳 순서대로 정렬된 LP판들이 있었다. 한 장 한 장 바이닐 무더기를 들춰보다 아는 곡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LP판을 덥석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중 한곡을 포스트잇에 적었다. 얼마 후 내가 신청한 곡이 흘러나왔다.



[나의 신청곡 감상평]

 

1) Barry Manilow - Can't Smile Without You


반가운 마음에 보자마자 신청해버린 것이 이 곡이다. 나는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재빨리 맨 앞자리로 갔다. 그런데 노래가 시작된 지 30초쯤 지났을까? 갑자기 Can’t smile without you~♬라는 가사에서 can’t can’t 하면서 LP가 튀기 시작했다. 세월의 풍화를 거치며 LP에도 문제가 생겼나 보다. 이렇게 고상하고 조용한 곳에서 이런 해프닝이라니! 이 곡을 신청한 내가 오히려 민망해졌다. 사장님은 다른 LP를 통해 이 음악을 다시 틀어주겠다 했다. (당시 상황이 궁금하면 이 파일을 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v=3V_7-7myPxM 



2) David Garrett -  Caprice Nº 24


언제 또 내 신청곡이 나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마침내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이 나왔다. 첫 음이 연주되자 로또 5등에 당첨된 듯 기뻤다! 악마 바이올리니스트가 광기가 완전히 차오른 상태에서 연주 중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 곡은 바이올린 연주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곡이었다. 만약 음악이 노래였다면 과연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였을까? 현의 마법사(David Garret)가 들려주는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민한 소리가 주는 짜릿함, 경이로움에 전율했다. 소파에 올린 손을 여러 번 까딱거렸다. 음악이 절정에 다 다를수록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고 환희가 느껴졌다. 곡이 끝날 때쯤엔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쳐야 할 것만 같았다.

백지화리스닝룸에서 감상한 Caprice no. 24

https://www.youtube.com/watch?v=Vg0dG6pIs2Y


3) Astor Piazzola Quintet - Adios Nonino


이곳을 떠나기 전 들을 수 있을까? 하고 노심초사했던 곡이 바로 이 곡이다. 하지만 피아노 솔로 연주가 흘러나오고 실망했다. 내가 기대한 버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반도네온, 콘트라베이스, 기타의 하모니가 내는 환상성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는데.... 이내 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솔로 부분이 너무 길어졌고, 함께 공유하는 청음샵에서 나만 맨 앞자리를 너무 오래 차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되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마침내 반도네온이 연주되기 시작했고 그제야 난 안도했다. 마지막에 바이올린이 소리가 합류되자 행복함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 이 곡은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곡이었지.’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 음악으로 행복해진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이 곡을 마지막으로 들려주신 사장님께 절이라도 할 판이었다.

백지화리스닝룸에서 감상한 Adios Nonino

https://www.youtube.com/watch?v=Ljq4K31puA4



[타인의 신청곡 감상평]


백지화리스닝룸의 장점은 타인이 신청한 곡을 듣기를 기분좋게 강요당하며 새로운 음악을 발견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 때문에 나도 평소 접하지 않았던 보석 같은 곡을 발견했다.

 


1) Here, There And Everywhere / The Beatles


이 곡은 오늘의 호스트 D의 신청곡이었다. 그는 지인을 통해 이 곡을 접했다고 했다. 지인이 자주 듣는 음악이라 본인도 좋아하게 됐다며. 그리고 이제는 나도 이 곡을 자주 찾는다. 이렇게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사랑 노래라니. 비틀스 노래가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https://www.youtube.com/watch?v=xdcSFVXd3MU 



2) The Beatles - Yellow Submarine


눈을 감아도 보이고 만져지는 곡이 있다. 이 곡이 그랬다. 앞선 비틀스의 곡과 같은 CD에 있어 듣게 된 이 음악.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 한 척, 방파제에 부서지는 파도소리, 파도가 부서질 때의 바닷물의 반짝임, 바다 짠내와 생선 비린내가 내 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이렇게 우리는 짧은 바다 여행을 하고 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m2uTFF_3MaA  



3) Auli'i Cravalho - How Far I'll Go (from Moana OST)


영화 Moana를 보지 않았음에도 거친 파도를 거치며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갑자기 용기가 샘솟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영감탐험단에서 가장 재기 발랄한 Y의 신청곡이었다. 요새 힘든 일이 있다고 했는데 이 곡을 듣고 용기를 얻고 싶었나 보다.  오랜만에 내가 씩씩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cPAbx5kgCJo


4) 김윤아 - Going Home


반갑게도 아는 곡이 퍼졌다. 하지만 오늘 들은 이 곡은 꽤나 낯설었다. 가수의 숨소리, 목소리의 떨림,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노래와 내가 함께 살아 숨 쉬는 느낌이었다. 콘서트장에서 그녀와 함께 소통하는 기분이었다. 위로가 필요한 날, 이 곡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R4_uoJdOr0 



5) 박재정 - Tonight


영감탐험단 B의 감성을 꼭 닮은 보드라운 곡이었다.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 노래가 말을 걸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해준다면 난 더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날 이후 난 이 곡을 내 최애곡 리스트에 올렸다.

백지화리스닝룸에서 감상한 Tonight

https://www.youtube.com/watch?v=qs_hCFwDBmg



[두 번째 영감탐험 후기]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음악을 듣는 일이 일상에서 얼마나 있을까? 이날 발견한 보석 같은 곡들은 바로 내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되었다. 긴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되고 나니 행복감이 충만해졌다.  


모든 음악엔 저마다의 사정과 이야기가 있다. 나처럼 고심해서 음악을 고른 이들도 있었고, 평소 좋아하던 곡을 신청했다는 사람, 가사가 아닌 멜로디에 집중하기 위해 가요가 아닌 일부러 팝송을 신청했다는 사람 등 음악을 신청한 이유들은 모두 가지각색이었다. 음악을 통해 서로의 삶과 감성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머무를수록 듣고 싶은 곡의 리스트가 마구마구 늘어나는 곳.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신청곡이 선택되기를 기다리게 되는 곳.

기분 좋게 듣기를 강요당하며 낯선 음악을 알아가게 되는 곳.

그리고 어떤 음악이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곳. 

이렇게 우리는 백지화리스닝룸에서의 두 번째 영감 탐험을 마쳤다.






[백지화리스닝룸 방문 Tip!]


1) 평소 좋아하는 곡을 가서 들어도 좋지만 본인만의 기준으로 리스닝룸에서 들을 곡을 미리 선정해 가는 것을 추천한다.

2) 나처럼 개별적인 악기가 자랑하듯 음을 뽐내는 음악을 선정하는 것도 좋고 Yellow submarine처럼 효과음이 많아 머릿속에 무언가가 그려질 수 있는 음악을 선정하는 것도 좋다.

3) 맨 앞자리에서 신청곡을 듣다 보면 처음엔 소리가 너무 크다 싶을 정도로 귀에 자극이 좀 온다. 하지만 금세 적응이 되니 안심해도 된다.

4) 타인과 공유하는 공간이므로 플레이타임이 너무 긴 음악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영감탐험단의 첫 번째 모임 후기가 궁금하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사진출처 : 백지화리스닝룸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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