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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나의 파우스트’를 보며 생각한 것

오래 기억되며 영원히 살기보다 지금 나로 살기


나는 주로 읽고 들으며 여가시간을 보낸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손엔 항상 책이나 읽을거리가 들려있고, 이어폰에서는 팟캐스트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텍스트에 집중된 일상을 보내지만, ‘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보고 싶었던 전시에서 생각이 트이고 영감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면서, 미술관을 찾는 건 어느덧 나의 리추얼이 되었다. 이번에는 ‘언젠가는 꼭 가볼 거야!’라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지도앱에 저장해 둔 백남준 아트센터에 가기로 했다. 회화나 사진전은 많이 가봤지만 비디오 아트는 생소한 것이었다. 한창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보자!’라고 생각할 즈음이었으니 잘 됐다고 생각했다.





첫 작품부터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TV로 정원을 만들 수 있다니....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그의 발상에 감탄했다.



백남준 I ‘TV 정원(Garden)’ 1974/2002


TV 정원, 백남준(1984)

우거진 수풀 속에서 TV들이 꽃송이처럼 피어있는 정원이다.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텔레비전의 전자적 영상이 다양한 리듬 속에서 생태계의 일부가 됨으로써 백남준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픽셀의 자극과 자연이 내뿜는 초록빛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했다.



백남준 I ‘TV 물고기(비디오 물고기)’ 1975/197



TV 물고기(비디오 물고기)

어항 안에서는 살아 있는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으며, 화면에는 춤을 추고 있는 머스 커닝햄,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그리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모습이 등장한다. 어항과 텔레비전 화면의 중첩을 통해 실제로 살아있는 물고기와 비디오 속 물고기는 하나의 시공간으로 합쳐진다. 관람자는 어항이 모니터가 되고 모니터가 어항이 되는 시각적 현상 속에서 평소와는 다른 시선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게 되고, 대상을 재단하여 보여주는 프레임으로서의 텔레비전을 인식하게 된다. 이는 기술과 자연의 공존과 상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그의 작품 중 해설 없이 이해할 수 있거나, 스스로의 해석을 덧붙일 수 있는 작품은 손에 꼽았다. 그만큼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더뎠지만, 예술가 백남준의 생각을 따라가는 일에는 그렇지 않았다. 얼른 그의 거대한 사유방식과 선견지명을 흡수하고 싶어졌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 백남준, 「임의접속정보」, 1980 -

오늘날 예술가들이 붓, 바이올린, 폐품으로 작업하듯이 언젠가 축전지, 전열선,
혹은 반도체를 갖고 작업하게 될 것이다.
- 백남준, 「전자 비디오테이프 녹화기」, 1965 -

‘예술과 기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과학적 장난감을 발명하는 게 아니라,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전자 매체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 백남준, 참여 TV,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1969 -




그는 내일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상을 향한 시선을 작품에 담고, 기술과 지식에 온기를 담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그는 죽었지만 영원히 살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차곡차곡 쌓아가면 이렇게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거기에 따뜻한 미래를 입힐 수 있는 걸까?


낯섦과 감탄의 순간 속에서 방황하다 어느새 전시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러다 오디오디바이스에서 흘러나오는 큐레이터의 설명이 나의 가슴 속 깊이 박혔다.



백남준 I ‘나의 파우스트-자서전’ 1989-1991 (출처 : 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


나의 파우스트-자서전

<나의 파우스트-자서전>은 예술, 교육, 농업, 건강, 교통, 통신 등 백남준이 주목했던 모든 개념을 망라한 대작이다. 서양 고딕 교회 또는 제단의 형태를 차용한 구조물 안에 텔레비전 25대가 설치되어 있고, 최상단에는 또 하나의 모니터와 안테나가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구조물의 표면에는 레이저디스크, 신문 기사, 편지, 악보 등이 콜라주되었다. 작품 한 쪽에 무심히 걸려있는 백남준의 외투 주머니에는 그가 늘 손에서 놓지 않던 신문이 꽂혀있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집필한 희곡으로 전 생애를 통해 성찰되고 완성된 대작이다. 이에 백남준은 <나의 파우스트>라는 제목을 붙여 그가 예술가로서 달성하고자 했던 평생의 과업을 전한다.



‘누군가 나에게 60년에 걸쳐 무언가를 만들어 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직업인으로서 살아온 60년의 세월을 응축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토록 오랜 시간을 거쳐 꼭 만들어내고픈 것이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동안 벗어나지 않는 하나의 궤적을 일궈가려면 분명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것이어야 할 거다. 그래야 나답게, 나의 이야기로 존재했다고 할 수 있으며, 비로소 ‘나’를 세상에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 '나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나의 하루들은 과연 어떤 메시지를 세상에 남기게 될까?' 그렇게 큰 고민을 짧게 반복하다 좋아하는 가수의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었다.


"‘어떤 음악을 하고 싶다’ 같은 마음은 별로 없어요. 음악을 진지하게 대하긴 하지만, 그 만드는 자세까지 매번 심각하게 하진 않는 것 같아요. 지금은 그냥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길이 남을 엄청난 명반을 만들어야겠다 ‘라기보다 저와 제 팬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더 자연스러우니까요."

                                                                         - <하입비스트>, 가수 죠지 인터뷰 중에서 -



이름을 남기는 것은 오래 기억되고 영원히 사는 방법이다. 백남준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후에 영원히 살 것을 걱정하기보다 지금은 '그냥 나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지금 괴테나 백남준처럼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세상에 길이길이 남을 나만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겠다. 지금의 내가 어떤 성질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알고, 그런 나를 또 인정하고 살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 한 것, 보고 들은 것의 궤적이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모이게 될 거다. 그리고 그게 축적되어 나만의 시선이 생기고, 관점과 철학이 명확해지겠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나의 삶을 사는 것, 그것만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늘 하루, 나답게 잘 살아보기로 다짐한다.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인 그런 하찮은 그것들은 끌어안고,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무리하게 끌어들이지 않으며 말이다.

이렇게 나는 점점 나 자신이 되어간다.




이미지/작품해설 출처 : 백남준 아트센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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