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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Feb 12. 2023

내가 바닥에 붙은 벌레 같을 때

도서명 검색을 해봤다.

'우울할 땐 걷기.'

이상하네, 없다. '우울할 땐 걷기' 같은 제목을 출판사에서 왜 아직 안 쓴 걸까. '우울할 땐 뇌과학'이나 '우울할 땐 공부', '우울한 날엔 니체'는 있지만 '우울할 땐 걷기'는 아직 없다. 우울할 때 무거운 뇌에다 무슨 뇌과학이나 니체를 집어넣는단 말인가. 하물며 공부라니.


그러면 아무튼 시리즈 책 중엔 있겠지?

'아무튼 걷기'

역시 없다. 이 좋은 제목을 아직 안 쓰다니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이 걷기를 잘 모르는 걸까? 걷기 중요성을 다룬 책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유명한 책 중엔 없다. 그나마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 정도뿐. 아마도 걷기는 한국에선 그리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닌가 보다. 안타깝게도 한국인들은 아직 걷기의 매력을 모른다.


*

그즈음 세상 모든 일이 귀찮았다.

머리는 어딘가에 맞은 것처럼 잘 돌아가지 않았다. 많은 것을 잊어갔다. 나는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바닥에 붙은 벌레 같았다. 카프카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는 벌레가 된 후에도 잘 돌아다녔지만 난 그보다 못했다. 그냥 하루아침에 느릿느릿 움직임도 둔해진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몸무게는 그대로지만 움직이기가 무거웠다. 집에 들어가면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뇌가 어딘가에 굴을 파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던 걷기조차도 귀찮았다. 나중에 상담을 받아보고야 알았다. 내가 좋아하던 걷기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 우울증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우울하니까 걷지 않았고, 걷지 않으니까 우울했다. 그래서 다시 걸었다.


지금껏 내게 만병통치약이 딱 하나 있다면 '시간'이 아니라 '걷기'였다. 우울할 때 걸으면 해결되고, 아무튼 걸으면 해결되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말한다. 그 말 믿고 시간이 지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때로 우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 오기 직전 구름층처럼 퍼져간다.


불면증이 있는 내가 퇴사 후 느지막이 일어나도 매일 지키는 루틴은  집밖을 나가 걷는 일이다. 때로 생각보다 늦잠을 자면 기분이 다운될 때도 있다. 우울증이 오기 쉽다. 오전 11시쯤 일어나면 하루 절반이 지난 것 같으니까. 나는 요즘 '사고의 착각'이란 꼼수를 쓴다. 나처럼 야행성인 사람에겐 권하고 싶다. 하루의 시작 시간을 늦은 오후나 밤부터라고 생각하라고. 내가 작업을 가장 오래 할 수 있는 시간을 '시작시간'으로 설정하면 된다.


가령 대개 밤 8시부터 집중해서 작업이 가능하고 새벽 1시에 잠든다면, 내 하루 시작시간은 매일 밤 8시, 20시다. 그럼 그날 낮에 바빠서 밤 8시까지 공부나 작업을 전혀 못했더라도 나는 하루가 끝나기 4시간 전까지 작업 하나 못 하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하루가 시작하자마자 새벽 1시까지 5시간이나 작업하고 잠드는 부지런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늦잠을 자서 11시에 일어나도 초조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 야행성 인간과 맞지 않는 아침형 인간들의 잘난 체에 기죽지 말자. 당당하게 말하자. 너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되냐? 나의 하루는 20시에 시작된다. 

 

어쨌든 늦게 일어난 날이더라도 지난번 글에 썼듯이 이달 목표 하나를 해버린다. 바로 책상에 가서 10분이면 성취감을 줄 것을 하나 해결한다. 요즘 나의 책상은 늘 깨끗하다. 무기력해져서 집안이 더러워져도 주로 생활하는 공간 1평 정도는 깨끗해야 한다. 다 밀어서 한 곳만 깨끗하게 만들면 된다. 그곳에서 10분이면 이룰 작은 성취를 한다. 가령 외국어 회화 연습이나 일기처럼 간단한 것으로. 10분 해결 후 바로 집밖을 나가서 걷는다. 집 근처 개천 산책을 40분 정도하고 나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다 괜찮아졌다.


이상하지. 맨날 같은 곳을 산책해도 맨날 좋다. 산책로 주꽃이 모습을 바꾸는 것도 좋고, 동네 길고양이 구경하는 것도 좋다. 산책로 근처에 반찬집이 사라지더니 세련된 편집샵 쇼룸으로 바뀌었다. 그 위엔 풍경 멋진 카페가 들어섰다. 이런 변화가 재밌다. 몇 달 사이 상전벽해를 동네에서 목격하고 있다. 요즘 개천 주변에 예쁜 카페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모른다. 오픈 준비 중인 한 곳은 내 마음에 쏙 들어서 2주 전부터 언제 오픈 하시나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볼수록 설레는 걸 어떡해.


나처럼 퇴사를 했거나 아니면 회사에서 계약종료가 되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면 일단 걸었으면 좋겠다. 나도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상실감이 컸다. 자신감도 떨어졌다. 아직 그렇다. 그래도 날이 풀렸다. 걸으면 언 마음녹는 풍경 바라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안다, 우울한 사람에게 좀 밖에 나가 걸으란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 말인지. 밖에 나가 걸을 정도의 의욕도 없으니 당신은 우울증일 것이다. 귀찮고 무기력한 당신에게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는다. 한 가지만 떠올려보자. 현관문 앞에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선물이 택배로 왔다고. 혹은 너무 먹고 싶은 음식배달이 왔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딸기생크림케이크거나 갖고 싶은 비싼 가방이거나, 우아한 롱코트거나, 최신 노트북이거나.


문을 열고 밖에 나간다. 귀찮아도 화장실 갈 힘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현관문을 열 수 있다. 보통 택배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는데 3초면 되지만 이번엔 밖에 머무는 시간을 30초로 이자. 가상의 택배를 문 안에 밀어 넣고 잠시 복도에 서 있자. 바깥공기를 이렇게라도 쇠자. 30초가 괜찮아지면, 1층까지 내려가서 1분을 어슬렁거린다. 그게 생각보다 괜찮으면 골목까지 3분을 배회하고, 또 괜찮으면 집 근처 공원이나 산책로까지 걸어본다. 처음 마음을 먹기 위해선 택배 받으러 문 열고 가는 일 정도의 의욕만 있으면 된다. 택배를 받으러 갈 때 그렇듯이 화장할 필요가 없고,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다. 닫힌 문을 열고 선물을 받으러 나가면 된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 너무 늦은 선물 수령은 피하자.)   


나는 한국인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 중엔 산책할 공간 부족도 그 원인이라 본다. 서울과 경기도엔 넉넉한 산책로 없이 아파트촌이 길게 이어져 있다. 한강 주변 아파트가 비싼 이유에는 한강뷰도 있겠지만, 한강시민공원이 연결되어 산책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시민공원까진 아니더라도 걷기에 나쁘지 않은 산책로를 마련해두면 좋다. 많은 사람듣이 헬스장에 시간을 보낸다.당연한 말이지만 집 근처 헬스장보다 집 근처 산책이 적어도 정신건강에는 좋다.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걷는 나'는 덜 분노하기 때문이다. 걷는 나는 덜 옹졸하기 때문이다. 걷는 나는 덜 슬프기 때문이다. 걷는 나는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멈춰있던 나는 모든 일이 어렵다 여겼지만 걷는 나는 달랐다. 걷는 나는 바닥에 벌레처럼 붙어 있던 나와는 달리 잊어갔다, 과거의 나를. 유튜브에서 본 내용이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구출해 온 강아지가 비가 오면 트라우마가 떠올라 울어댔다. 그런데 신기하게 비를 맞고서라도 동네 산책을 시켜주면 금세 좋아졌다. 개가 겪은 것 같은 트라우마는 없지만 나도 산책으로 다 잊곤 한다. 아무튼 걷기다. 우울할 땐 당연히 걷기다. 내가 걷기 책을 낸다면 책 제목은 <<우울할 땐 걷기, 아무튼 걷기>>다. 문 앞에 당신을 위한 선물이 도착해 있다. 문을 열고 나가자.   




ps 걸어도 걸어도 해결이 안 되면 병원이나 심리상담센터를 가야 한다. 그곳은 나의 바닥난 세로토닌을 채워준다.

키키스미스전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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