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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Oct 31. 2022

사랑과 비린내는 숨길 수 없다

[커피값 프로젝트] 늦겨울호 2021. 01. 20. Wed.

〔커피값 프로젝트〕 2021. 01. 20. Wed.: 사랑과 비린내는 숨길  없다 - 김수빈


하루 종일 노인들을 돌보며, 구십 년을 살아도 애정 받고 싶은 건 여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구십 년을 살았기 때문에 독점하고 싶은 것인가. 온종일 퍼즐 열두 개를 맞추는 할아버지는 눈 흰자로 나를 곁눈질하고 나면 크흠, 소리 내며 퍼즐 판을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잘 큰 자식 어깨 두드리듯이. 벌써 다 맞추었으니 알아봐달라는 신호이다. 퍼즐 네 개 맞출 때마다 한 번씩 칭찬을 해주고 있지만 그날은 왠지 그런 모습이 징그러워 모른 체했다. 그리고 퇴근길 경전철에서 같은 것의 변형을 보았다.


내 앞에 앉은 노인은 쪼그라든 자세로 아무 것도 씌우지 않은 낚싯대 하나를 맨손으로 덜렁 들고 있었다. 발치에는 빨간 칠이 다 벗겨진 철제 공구함이 있었는데, 그가 오늘 생선을 잡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었다. 꽤나 진중해 보이는 공구함의 굳게 닫힌 입이 무색하게 생선 냄새가 이미 온 객실에 다 퍼져 있었으므로. 승객들은 빨간(페인트가 다 벗겨져 그게 빨간색이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었는데도 이것을 여전히 빨간색이라고 불러주어도 될지는 모르겠다) 공구함과 노인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바라보았고, 모두가 자신이 고기를 잡았다는 사실을 안다는 걸 노인도 알 것이 분명했으나 그는 전혀 자랑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데친 시래기 같이 앉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옆에서 노인을 흘끗거리던 아저씨는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왼팔을 잡으며 고기를 좀 잡았냐고 물었다. 노인은 용수철처럼 반응했다. 경전철 역 아래 개울에서 몇 시간을 서있었는데, 날이 추워서 고기가 요즘은 잘 잡히지가 않는데, 내가 오늘은 잡았다 아이가. 그런 말들을 할 때 그의 주름이 모두 펴지고 앉은키가 오 센티미터 쯤 커졌다. 지켜보던 나는 아저씨는 거제 사람이고 노인은 박물관역에 산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내릴 역에 도착한 노인은 전철에서 내리다 말고 몸통을 반쯤 도로 디밀고는 말했다. 매일 옵니다, 매일. 마치 내일도 모레도 이 자리에서 만나 그 날의 수확을 공유하자는 것처럼. 고기 잡는 자리에 어느 날 나타나 함께 시간 보내는 운명적 인연으로 이어질 기대를 품은 듯이. 아저씨는 형식적인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떠나기를 멈칫거리며 예정된 이별을 유예하는 노인의 눈에서는 목소리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언제든지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니 너만 와주면 된단다.


아저씨는 노인이 내리고 나자 내 옆에 앉은 부부가 이 다음 역이 어디인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유심히 엿듣고는 여기가 무슨 역인지 묻지 않은 해답을 내놓았다. 부부는 고맙지 않았다. 자신들만의 나름의 유희에 방해를 받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다른 논쟁으로 금세 옮겨갔다. 그는 입을 다물고 다른 승객들을 탐색했다. 어딘가 자신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또 있진 않은지...


나는 그가 남에게 참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고쳐먹었다. 그는 관심을 받고 싶은 것이다. 얇고 넓은 그물을 던져 걸리는 마주침을 구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아는 무엇들을 늘어놓고 누군가 하나 덥석 집어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기 기다리는 중이고, 그러면 그는 냉큼 묻지 않은 설명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몰락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본 장면에 나타나지 않은 그들의 삶에 대해 제멋대로 상상한다. 앉은 자리에서 국어사전을 검색한다. 몰락; 재물이나 세력 따위가 쇠하여 보잘것없이 됨. 보잘것없다니, 말이 좀 심한 것 아닌가 발끈해본다. 단어를 단어로 보지 않고 사람에게 적용하여 보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기실 심한 건 나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내 무의식을 반영하는 명백한 글자를 보았을 때 지레 찔릴 수밖에.


이어서 생각한다. 유독 관심을 갈구하는 몸짓을 내보이는 이들은 지금까지 관심의 생활필수한도를 채우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일까, 응당 자기 것이었던 관심을 어느 날을 기점으로 천천히 모두 회수 당하고 있기 때문일까. 관찰을 멈추고 무릎을 내려다본다. 애초에 가진 재물이나 세력도 없으니 내겐 아직 몰락이랄 것도 없지만 매일 이 자리에 있겠다는 약속을 홀로 해본 적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진 밑천을 모두 털어 그럴듯하게 정렬해두고 아무나 하나쯤 알아봐주길 바란 적 없지도 않았다. 풍겨오는 냄새를 빌미로 말 걸어보는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버스에 탄 모르는 이에게 문득 안기고 싶었던 날을 아직 잘 기억하고 있으니.


전철이 종착역에 천천히 멈추었고 어느새 객실 안에는 관찰할 노인도 아저씨도 부부도 없었다. 이제 그만 내려서 집에 가야 했다. 비린내 나는 공구함도 논쟁할 옆 사람도 누구 하나 붙들고 말 걸 건더기도 없는 나는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지며 일어나 교통카드 찍고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퍼즐 할아버지가 노래자랑 시간에 부르던 가사를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며.


싸늘하게 식은 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 아 사랑이란 이렇게도 애가 타도록 괴로운 것이라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기다려요 아 사랑이란 이렇게도 ...


고독을 검색했다. 누군가 전에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것인데, 차라리 고독이 낫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고독한지 외로운지 알고 싶었다.


1.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2.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


나는 그냥 외롭기로 했다. 오늘만은 차라리 그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이어폰을 귀에 쑤셔 넣었다. 낮 동안 틀어주느라고 40년대 가요와 트로트를 검색한 기록이 가득했다. 나는 그냥 그 중 하나를 누르고 길 따라 난 하수구 위를 걸으며 생각했다. 고독은 왠지 가을 벤치 같고 외로움은 놀이터 정자 같아서, 고독하다고 할 때가 형편이 좀 더 나아 보이곤 하지만 실은 그저 외로움의 숙성일 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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