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콜(Homerun call). 홈런이 나왔을 때 캐스터가 외치는 말을 홈런콜이라고 한다. 야구의 꽃은 홈런이고, 그 순간은 캐스터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때이기도 하다.
야구 중계를 오랫동안 해온 캐스터들에게는 고유의 시그니처 홈런콜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이기호 선배님의 "쭉쭉 뻗어갑니다!"를 좋아했다. '쭉쭉'이라는 의태어가 주는 느낌이 홈런과 너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3음절 연속으로 된소리가 나오면서 듣는 맛도 좋다. 특별히 멋 부린 것 같지도 않으면서, 강렬하게 꽂히는 멋진 홈런콜이다.
나도 야구 중계를 시작하고 나만의 홈런콜을 만들어볼까 고민했었다. 고민의 결과 내가 점찍은 단어는 '멀찌감치'였다. 순전히 음운학적인 이유인데, 거센소리와 된소리가 다 들어가 있어서 자연스레 악센트를 줄 수 있고, '멀'에 장음으로 포인트를 주면(엄밀히 표준국어대사전 기준으로 따지면 '멀찌감치'의 '멀'은 장음은 아니지만, '멀ː다'와 '멀ː리' 모두 장음이기에 '멀ː찌감치'로 발음해도 무리는 없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했다) 리듬감을 살리기도 용이하다. 시그니처라고 말하기에는 매우 부끄럽지만 그래도 여전히 홈런이 나오면 "멀찌감치, 멀찌감치 넘어갑니다"라는 멘트를 즐겨 쓰고 있다.
하지만 홈런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 터져 나오고, 그 순간의 짜릿함을 제대로 전달하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시즌 동안 중계를 하면서 수십 번 홈런콜을 외치게 되지만, 스스로 정말 마음에 드는 홈런콜은 손에 꼽을 정도다. 마음에 드는 홈런콜이 나오면 나도 그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보면서 짜릿함을 되새기곤 한다.
다음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스스로 마음에 들었던 홈런 장면들이다.
1. 2018년 5월 8일 정은원(한화)
그해 2차 3라운드 신인이었던 정은원이 당시 넥센의 특급 마무리 조상우를 상대로 때려낸 데뷔 첫 홈런이다. 정은원에게는 데뷔 후 여섯 번째 타석에서 때려낸 첫 안타이기도 했다. 나중에 듣기로 그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홈런을 쳐본 적이 아예 없었다. 말 그대로 생애 첫 홈런이었던 셈이다. 마침 어버이날이어서 경기 후 인터뷰에서 부모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것도 생각이 난다. 이 홈런으로 한화는 3점차에서 1점차로 추격했고 결국 이 경기를 뒤집으며 승리했다. 나에게는 야구 중계를 하며 처음 제대로 느낀 홈런의 짜릿한 맛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정은원 선수를 보면 입단 동기를 보는 것 같은 괜한 반가움이 있다.
2. 2018년 7월 8일 최정(SK)
얼마 전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의 주인공이 된 최정의 300호포였다. 나는 멘트를 미리 생각하고 들어가는 편은 아닌데, 이날은 기록이 걸려 있어서 조금 고민했다. 결국 언젠가는 이 선수가 리그 홈런 기록을 다 갈아치우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KBO리그 홈런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갈 사나이'라는 콜을 준비했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올해 최정은 홈런 역사를 새로 썼다. 신기록 달성 기념으로 구단이 만든 최정의 홈런 발자취 영상에 이 300홈런 장면도 들어가 있는 걸 보고 내심 뿌듯했다.
3. 2018년 8월 7일 유한준(KT)
나는 유독 창원에서 중계를 하면 치열한 승부가 많았던 기억이다. 지금은 NC의 2군 구장이 된 마산구장에서 열린 이 경기도 그랬다. 9회초 1아웃에 마무리 원종현을 상대로 유한준이 작렬시킨 역전 만루홈런이다. 나는 웬만하면 타구를 끝까지 보는 편이라서, 딱 맞는 순간 바로 홈런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진 않은데 이때는 바로 느낌이 왔다. 기적적인 홈런이라 순간적으로 KT의 상징인 '마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그야말로 마법 같은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KT 위즈!"라는 멘트가 나왔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돌려본 홈런 장면 중에 하나다.
4. 2021년 6월 22일 이형종(LG)
내가 중계를 했던 경기를 통틀어 홈런이 가장 많이 나온 날이 아닐까? 이날 총 8개의 홈런이 터졌고 그중 7개가 LG의 홈런이었다. 이 홈런이 네 번째였는데, 나는 "야구의 꽃이 홈런이라면 오늘 LG 트윈스는 팬들에게 화려한 꽃다발을 선물하고 있습니다"라는 제법 문학적인 멘트를 날렸다. 이 뒤로도 홈런이 그렇게 더 나올 줄은 모른 채.... 사실 즉흥적으로 나온 멘트는 아니고, 인천 문학구장 중계를 가면 항상 홈런이 많이 나오는 편이라 중계 전에 혼자 머릿속으로 '홈런이 야구의 꽃이라는데, 홈런이 많이 나오면 꽃다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상황이 잘 맞아 떨어져서 기억에 남는 장면.
5. 2021년 6월 26일 양의지(NC)
아주 많이 기억에 남는 경기다. 타구가 날아가는 동안 나는 양의지의 이름만 세 번 외쳤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이 홈런의 느낌을 잘 전달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때 기억은 정말 생생한데, "동점 홈런!"이라고 외친 뒤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무 몰입하다가 잘못하면 쓰러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쓰러지진 않았고, 정말 마음에 드는 홈런콜을 남겼다. 이 경기는 10대 10 무승부로 끝났었다.
6. 2021년 8월 14일 이성열(한화)
누상에 노시환, 최인호, 장운호가 나가 있었고 이성열이 동점 만루홈런을 쳤다. "누상에 나가 있던 모든 아기 독수리들을 형님 독수리가 집으로 불러들입니다"라고 표현했다. 이 홈런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이게 이성열의 은퇴 전 마지막 타석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타석을 만루홈런으로 장식하고 은퇴하는 타자가 또 있었을까? 그는 '좋은 추억으로 은퇴할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했다. 그 순간의 캐스터일 수 있었던 건 나에게도 행운일 거다.
7. 2023년 4월 27일 오재일(삼성)
이 홈런이 나오기 전까지 오재일은 매우 부진한 상태였다. 타율이 1할대로 떨어져 있었다. 그런 선수가 가장 결정적인 홈런을 때렸다. 정말 나오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이 정도로 목놓아 샤우팅을 하는 건 정말 한 시즌에 한 번 나올까 말까다. 옆에서 김태형 해설위원은 "이게 야구네요"라고 했다. 그 말대로 야구의 참맛이 온전히 느껴진 홈런 한 방이었다. 이날 중계를 마치고 귀성하는 길까지도 전율의 여운이 계속됐던 기억이 난다. 이 장면은 유튜브에 중계석 캠으로도 올라와 있다. 캐스터가 어떤 표정으로 홈런을 외치고 있는지 혹시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