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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안 Jul 14. 2024

오도가도 못하고






그러니까, 공모전에 글을 내야겠다고 결심하고부터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에세이 잡지에 유료 기고를 처음 하고선 기세(?)를 이어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우선 떠오르는 몇 가지 소재를 우선 적어 봤다.


조카 등원시키러 가는 장마 속 아침

세상을 받아들이는 시작, 언어

취향을 기르기로 결심한 계기

아빠를 닮아가는 나

박박

...


하지만 생각이 길게 뻗지 못한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나, 내면성찰 종류. 누군가는 브레인스토밍으로 아이디어를 마구 뽑아 낸다는데 내 안에서 폭풍의 기미는 없어 보인다. 평이한 주제들. 큰 질곡 없이 살았다는 반증이라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대문호는 무엇 하나 특이할 것 없는 소재에서도 인간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하지만 나는 대문호는 아니기에 일단 소재에서 싸움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시험 준비는 기출분석이 시작이다. 이전 공모전 수상작들을 찾아 읽었다.

실마리를 얻고 싶었는데 기운만 더 빠지고 말았다. 내가 애써 생각해낸 소재가 딱히 남다르지가 않다. 대체로 부모님이나 자녀 등 가족들에 관한 사랑. 비슷한 부류이니 좋지 않느냐 싶겠지만 이 쪽에서는 내가 승부를 걸어도 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회한(두 분 모두 살아 계시며, 성인이 된 자녀의 독립 이후 오히려 건강을 회복하시는 모습이다)이나 자녀에 대한 끝없는 사랑(아직 없기에 조카 등원에 열을 내었다)이 없기 때문에 감정의 진폭에서 벌써 싸움이 안되는 느낌?

브런치에서 항상 인기 끄는 주제 삼대장이 왜 개인의 우울과 이혼과 퇴사 이후 세계여행인지 알게 된 것만 같다. 브런치만의 이야기가 아니군. 하긴, 우리가 업으로 글쓰는 문인도 아닌데 세상만물이 소재가 되어 툭 쳐서 글이 나온다면 그대로 이상한 일이다. 인간 보편의 정서를 건드리며 깊은 성찰을 일깨우는 쪽은 역시 이런 분야인 것이다.



이번에는 유명 작가의 글에서 힌트를 찾자. 베이컨 수필집을 읽었다. 이쪽은 또 어렵다. 너무 깊이 있는 고찰에 질식할 것 같아서 다른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컴퓨터에 적다가, 아이패드에 적다가, 손으로 쓰면 뭐가 좀 뽑혀나올까 싶어서 일기장에 썼다. 나오는 게 없다.

신주단지처럼 모시며 남편을 접근조차 못 하게 하던 일기장, 이제는 그냥 책장에 꽂아두었다. 잊어버린 비밀이라도 없나 해서 일기장을 앞부터 찬찬히 살펴본 후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보면 큰일 나는 대단한 것이 없다는 걸.

아니, 숨길 무엇이라도 있다면 악상이나 시상처럼 문상이 흘러나오려나.






MOTIVATION. 

나의 글쓰기는 온전히 안에서 끄집어낸 창조라기보다는 세상의 작용에 대한 나름의 반작용이다.

지금은 심리적 동기만 있고 작용이 없어서 반작용으로 튕겨나올 메시지가 없다. 그게 없으면 전시를 보거나 글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뭐라도 해서 반작용을 이끌어내야 한다.

공명심 없다면 기만이지만 취미를 심화하려던 게 먼저다. 이왕이면 재미있고 즐겁고 싶어서 공모전까지 생각했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 뭔가만 계속 희번득이며 찾는 며칠째.





이 사람의 마음이 얼추 이해가 된다







※아래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 늦게 <인사이드 아웃 2>를 보았다. 픽사 영화의 작법은 이제 대중에게 빤하다. 보기도 전부터 메시지를 다 알아버린 영화였지만 그래도 감동적이었다. 아는 맛이라 더 맛있는 픽사의 맛.

픽사 영화가 성인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어른이 되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현실의 순간을 의외로 덤덤히 바라보기 때문인 것 같다. 

1편과 2편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9년. 주인공 라일리는 씩씩하게 자라 사춘기를 맞았다.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감성이 말랑말랑한 시기.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과 진폭이 비약적으로 확장되는 나이. 한때 내가 거쳤던 때를 돌아보고 왔다.

불안과 질투, 당황, 따분함 등의 새로운 감정을 층위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남았다. 안락한 울타리를 벗어나고 낯선 사람들과 섞이면서, 나 자신만이 최초이자 최고였던 시기를 필연적으로 벗어나면서 느끼는 감정. 하지만 그들을 억눌러야 할 것으로 보지도 않고,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혀도 그것만으로 한 인간을 정의하려 들지 않았다.



최근 봤던 법륜스님의 선심과 악심이 다 무상하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무상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정해진 하나의 상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선심과 악심이 마음 속을 빠르게 오가도 그 자체가 나를 정의할 수는 없다고.

음, 그래도 악심만 주로 떠오르면 나쁜 사람 아닐까 싶기는 하다.



말을 듣는다고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나는 불안과 질투, 당황, 따분함 모두를 최대한 억누르며 살아 보고 있다. 억누르지 못하면 그래도 최소한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아야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불안과 질투, 당황, 따분함을 못 느끼도록 스스로 채찍질해 더 잘 된 위치에 나를 올려놓거나.

(요즘 읽는 책 <어쩌다 한국인>에서는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심리특성 중 하나라고 했다)

개인의 부정적 감정을 묻는 게 도리라고 여기는 건 내 신념이지만 남도 좀 그래 주면 좋겠는데. 이런 마음이 내가 잘 참고 살았다는 보상심리로 어디서 터지는 것 아닐까 가끔 궁금하다.






억지로 영감을 얻으려니 더 안 된다. 약간의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예술의 전당 '디지털스테이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지금은 티에리 위에가 <어린 왕자>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들로 구성된 공연, '티에리 위에의 어린 왕자'를 보며 글을 마무리 중. 소설을 읽고 이러한 레퍼토리를 만든 티에리 위에가 대단하게 보인다.



무엇인가 멋진 메시지를 깨달았다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몇 문장 쓰다 모두 지웠다. 쥐어짜서 깨달은 척하는 글은 나중에 반드시 나를 부끄럽게 한다. 안 어울리는 화장을 할 바에는 깨끗하게 선크림 잘 펴바른 얼굴이 낫다. 오늘은 이대로 마무리한다.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었는지에 대해 더 고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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