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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천권 Oct 01. 2023

나의 절박함



어릴 적 자전거 타기

시골 골목길에서 어른들 자전거로 키가 작아서 자전거에 올라타면 발이 제대로 땅에 닿을 수도 없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싶었나 보다. 이유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아이들 키에 맞게 자전거가 나오고 심지어 보조 바퀴도 있다. 나 어릴 적엔 그런 자전거는 없었고 두 종류였다. 짐을 잔뜩 실을 수 있는 운송용 자전거와 일반인들이 타는 자전거로 구분되었다.


우리 집에도 일반용 자전거가 있었다. 누가 타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리가 짧은 내가 자전거를 타는 법을 어찌 알게 되었을까? 암튼 기억나는 것이 자전거의 중간 공간으로 오른쪽 발을 반대편 페달을 밟고 왼발은 자전거 이쪽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자전거를 조종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도 잡아주는 사람이 없다. 골목에서 어찌어찌 자전거 사이에 발을 넣고 몇 번 페달을 밝기도 전에 넘어지고 벽에 장딴지를 긁는다. 그래서 그 당시 내 다리엔 고름이 있고 상처가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른들이 나가고 없는 시간이 되면 골목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결국 해 냈다. 자전거를 골목에서 탈 수 있게 되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길로 나갔다. 어디를 가던 걸어 다녀야 했던 내가 자전거로 다니니 금방 이었다. 그러다가 자전거 안장에 앉는 연습을 했다. 자전거가 멈춰야 할 때는 자전거에서 뛰어내렸다.



가죽 축구공

당시 초등학교 2-3학년정도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차는 공 말고 제대로 된 축구공을 차고 싶었다. 내 주변에 그런 공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축구공이라고 생긴 걸 가진 사람이 없다. 나는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 축구화? 그런 건 꿈꾸는 게 아니었다. 그냥 공만 찰 수 있으면 되었던 시기다. 지금처럼 브랜드가 있거나 가죽으로 만들어진 제대로 된 축구화는 글쎄 우리 집이 가난해서였을까? 가난하지는 않았고 부자는 아니었던 거 같다.


내가 살던 곳의 조기 축구하는 어른들은 가죽공으로 게임을 했다. 골망도 없어서 골이 되면 골대 뒤로 지나간다. 어른들은 그게 귀찮다. 그 귀차니즘을 돕는 게 나의 역할이다. 볼보이. 지나간 공을 향해 열심히 달려서 재빠르게 앞으로 보내면 어른들이 좋아한다. 공을 정확하게 골키퍼에게 차 줘야 야단을 맞지 않는다.


우리 집에 가끔 오는 강아지들이 내가 뭔가를 던지면 열심히 달려가서 주워온다. 그 강아지만큼 열심히 달렸다. 달리기도 빨라야 많은 공을 찰 수 있다. 내 달리기 실력이 그래서 좋아졌나 생각된다. 공을 정확하게 보내야 하기 때문에 공을 차는 실력도 점점 좋아졌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보다는 나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잘하고 싶었다. 잘하는 것은 절대로 그냥 되는 게 없었다. 댓가를 치러야 했다. 시간을 들여서 노력을 하고 생각을 하고 다시 연습을 하는 이 과정을 언제나 동일했다.



사진

갑작스러운 사직으로 웹프로그램을 배우고 홈페이지 개발을 하게 되었다. 평소 알던 지인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일을 하게 되었는데, 2004년 즈음 저작권이 한국에서 힘을 떨치기 시작한다. 사진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진을 사려고 하니 제작하는 홈페이지 개발 비용대비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 결론은 그럼 내가 찍어야지.


아내를 설득해서 디지털카메라를 사기로 했다. 당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캐논 300D 가 그래도 부담이 덜 했다. 렌즈는 번들 렌즈였다. 이 카메라를 사는데 아내는 카메라로 돈을 버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데 대답을 해야 했다. 2년 정도면 사진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카메라를 사기 이전엔 별로 사진을 찍어보지 않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사진 이쁜 사진을 눈여겨본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샀으니 네이버 카페에 가입을 해서 초보자를 위한 글을 열심히 읽고 저 세상 레벨의 그들의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열심히 따라 했다. 출사를 다녔다. 그러다가 장비병이 걸렸다.


사진업체에서 진행하는 조명 다루는 수업을 들었다. 함께 모여서 조명을 어떻게 사용하고 조도계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조도계를 사용하면서 빛이 번쩍한다. 조명의 위치를 변경하고 인물을 적당한 곳에 있게 하면 좋은 사진들이 나온다. 음식 사진도 조명의 위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본적인 사진이 나온다. 여기에 여러 가지 요소들을 첨가하면 맛깔스러운 사진이 나온다. 이 사진을 프로그램으로 마무리하면 우리가 시중에서 보는 사진들로 광고를 한다.


처음에 내가 1000장을 찍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보여줬다. 아내가 묻는다. “왜 찍었어?” 한마디에 다 지웠다. 한숨만 나온다. 찍을 때 나름 이쁘게 생각해서 찍었는데 그걸 담아낼 수가 없었다. 18-55mm 렌즈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안다. 이 렌즈로 어떤 사진을 담아야 하는지. 전문가는 내가 가진 장비로 뭘 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다. 전문가라고 모든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처음 카메라를 사고 아무리 찍어도 제대로 된 사진이 한 장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찍으면 실수로라도 한 장을 건질 만 한데 그런 게 없다. 찍는다고 다 같은 사진이 아니었고, 같은 공간에서 다른 사진이 나온다. 사진을 전공한 어린 대학생과도 함께 출사를 종종 나갔는데, 그 골목길에서 그들이 잡아내는 그림은 딴 세상이었다. 장비를 탓했다. 약간의 모험을 하면서 장비를 변경해 보기도 했다.


장비도 장비지만 이론이 너무 부족했다. 당시 대기업에서 초보 사진작가들을 위해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강연회를 만들었다. 참석했다. 강의의 대부분은 열심히 공부한 탓인지 너무 초보스러웠다. 내 목적은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을 쉬는 시간에 강사에게 질문해서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답은 알려주지 않았지만 비슷한 답을 줬다. 정말 고마웠다. 그래서 강의를 듣고 집으로 와서 세팅을 하고 테스트를 했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진도가 나갔다.


그 당시 내 숙제 중 하나가 한 업체에서 크리스탈 제품 사진을 찍어 달라고 제품을 보내온 상태였다. 그리고 참고할 화보도 줬다. 제품 원업체는 100년 된 유럽 회사였다. 아직 내공이 부족한 내가 감당하기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다행히 클라이언트 업체는 촬영 시간을 넉넉히 줬다.  하지만 시간은 가고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백화점을 갈 일이 생겼는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 진열대가 있었다. 답을 찾았다. 그래서 빨리 집으로 와서 세팅을 해서 찍었다. 업체가 사진은 좋은데 세팅이 맘에 들지 않는단다. 빛을 찾았다.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그 업체의 모든 것을 들어주고 작업을 하기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정중하게 제품을 돌려보냈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2년이 안되어서 저렴한 사진을 찍어서 사진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홍보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내가 찍는 사진 샘플과 가격 안내를 했다. 결국 일은 점점 커져서 스튜디오를 갖게 되었다.


내 마지막 카메라는 2005년 구입한 캐논 1ds mk2와 캐논 70-200 mm L is, 24-105mm L, 17-35mm 탐론 조합이었다. 지금도 그 카메라는 가지고 있다.


나는 아저씨를 넘어 할아버지가 되려나? 애들을 보면 핑계가 많다고 생각한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너무 자주 나오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나도 핑계가 참 많은 것 같다. 이래서 저래서… 핑계를 넘어선 도전이 필요하구나 생각이 든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절박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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