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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of Kims Oct 12. 2022

연륜이라는 이름의 착각

링크드인 프로필, 이력서 또는 커버레터(자기소개서)에 써야 하는 것, 쓰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수만 가지의 팁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포인트는 지금까지 쌓은 경력의 길이, 즉 연차에 대한 것이다. 영어로는 I have xx years' experience in...으로 시작하는 패턴으로 대표된다. 이는 언어와 문화권을 불문하고 두루 관찰되는 현상인데, 알고 보면 가장 무의미하고 쓰레기 같은 관용구다. 이 말에는 한 사람이 한 분야에 몸담은 기간의 총합이 그 사람의 업무 능력, 역량, 안목, 탁월함 등과 정비례한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어떤 사람의 소개말 또는 글에 연차(햇수)가 가장 먼저 언급된다는 것은 곧 달리 내세울 객관화된 결과물과 컨텐츠가 딱히 없다는 걸 방증한다고 봐도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클리셰는 경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표준화된 커리어의 단계별 진화 (career path), 고용의 국경 그리고 시간대의 장벽이 빠르게 없어지고 있는 2022년 현실 세계에서 사람의 역량을 세대 구분과 연차로 가늠한다는 것은 힘들다, 가 아니고 그냥 불가능하다.


동갑 외에는 친구가 될 수 없으면서도 "입사 동기"라는 개념은 존재하는 문화권, 즉, 대한민국 플러스 세계 각국의 한인 서클에서는 이 연차라는 것을 특히나 더 중요시한다고 일반화할 수 있겠다. 한국의 인사 전문가들은 1, 2, 3, 5, 7, 10, 15년 차 커리어가 어떤 식으로 신입사원 > 중고 신입 > 대리 > 과장 > 차장 > 부장이라는 틀에 딱딱 들어맞아야 "정상"인지를 친절히 설명한다. 나이와 연차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발달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이와 더불어 무슨 M인지 Z인지 굳이 출생 연도로 세대를 구분 지어 모든 사회 현상을 해석하려 노력하는 자체가 이미 구시대적이다.


쌓여가는 시간의 총합이 더 지혜롭고 더 능력 있고 더 상식적이고 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을 만든다는 자연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모습의 어르신들은 극히 드물고, 눈에 보이는 것 기준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가 더 일반적이다. 꼰대라는 단어를 굳이 꺼내거나 정의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나이를 내세울까. 그것은 늘어가는 햇수가 뭔가 산술적으로는 따질 수 없는 경험치 또는 연륜(prowess)을 만들고 이 연륜이라는 것이 신지식, 적응력, 사고의 전환, 계산된 위험 감수, 새로운 발견, 프로세스의 단순화, 자동화, 전문화, 효율의 극대화, 이 모두를 합한 것보다 어쨌든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어권 정서에서는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유교 문화의 폐해가 크다. 백 년도 더 전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망하게 한 그 유교적 질서, 세계관과 직업관 말이다.


지금은 "능력주의", "각자도생", "인구절벽"의 시대다. 오로지 나이와 연차를 기준 삼아 누군가 누구에게 마땅히 해야 할 도리, 누군가 누구에게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 따위는 세대 간에도 직급 간에도 없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배울 대상은 사실 어르신들이 아닌 나보다 젊은 사람들일 확률이 크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덧붙여, "아랫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와 예우를 자신들에게 하지 않아서" 뚱해 있거나 화가 나있는 수많은 상사, 부모, 인생 선배들이 안타까운 이유는 20대의 하루, 40대의 하루, 70대의 하루, 그 각각의 무게가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 때문에 아무런 수학적 설명이 필요 없다. 나이가 들 수록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과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하루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반면에, 스스로 생각해봐도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분노에 절어서 낭비하는 하루는 막대한 손해, 어쩌면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스케일의 자해가 된다. 마치 단기간에 불안정하게 미쳐 날뛰는 주가의 등락폭처럼 말이다.


나이, 연차, 의미 없지 않다.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관용과 여유는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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