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새내기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냐?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배움의 기회는 언제든지 온다. 나의 학교생활은 엄청 길다. 남들이 다 다니는 국․중․고등학교 졸업 그리고 취직했다. 결혼해서 아이들이 셋이다. 그중 둘째 아들이 당시에 알 수 없는 희귀병에 걸렸다. 축 늘어진 아들을 업을 수 없어 가로 안고 병명과 약을 찾아 전국을 다 돌아다녔고 좋다 하는 곳과 것을 찾아 헤매었다. 의사 가운을 붙들고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참 그때 생각하면 살아온 길이 가마득하다. 스무 살 미만에 말라죽는다는 아들을 안고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남아있는 자식들만 아니면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아들은 살았고 휠체어를 타는 1급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학교생활은 다시 이어졌다. 아이를 유모차에 앉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초․중․고․대학을 함께 다녔다. 많은 사연들이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말도 안 될 것 같던 일이 일어났다. 아들이 분가를 했다. 아들은 몸이 불편할 뿐이지 장애인 활동보조 선생님의 도움으로 타지에서 혼자 잘 살았다. 나는 한 달에 몇 번씩 올라가던 것을 석 달에 한번 늦으면 여섯 달에 한번 가봤다. 아들은 훌륭하게 홀로 서기를 해냈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도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시간은 흘러 서로의 삶에 충실할 때쯤 주말에 집에 온 아들의 가방에서 약을 발견했다. 느낌이 이상하여 다음날 아들 집으로 가보았다. 식탁 위에 뒹구는 약봉지들… 이비인후과, 비뇨기과, 정신과, 봉지마다 다 다르다. 그날 밤에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여자 친구 모친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헤어졌다했다. 매일 밤마다 전화가 와서 온갖 심한 말로 아들을 괴롭혔다. 아들은 신경쇠약증에 잠을 못 잔다. 귀에는 이명이 들리고, 신경성 방광염이 오고, 우울증으로 정신과 약을 먹고 있었다. 아들의 얼굴은 형편이 없었다. 다음날 나는 간단한 짐을 챙겨 대전으로 올라왔다. 지난 일이라고 이렇게 글을 동요 없이 쓸 수 있다니 나도 지금 새삼 놀란다. 정말 시간은 약 인듯하다.
그사이 코로나 19는 먹구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우울증에 공황이 겹쳤다. 어느 날 아침 알람은 이상했다. 늘 하던 이불 감고 뒹굴기를 포기하고 일어났다. 작은방 문을 여는 순간 어둠이 아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숨이 곧 멈출 것 같은 순간. 고통에 경직된 눈빛. 차마 울 수도 없는 얼굴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결국 이 지경이 되어서야 아들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가 힘들어할까 봐 아파도 혼자 해결하려던 아들을 내려다본다.
벌써 대구를 떠나 온 지 삼 년이 넘어가고 있다. 아들을직장에 보내 놓고 적적했다. 평생을 바쁘게 살다가 할 것이 없으니 처음에는 몹시 허전했다. 평생교육원을 찾아갔다. 수필 글쓰기 공부를 하였다. 재미있었다. 나는 글재주가 있는 것 같다. 선생님도 칭찬을 해주셨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졌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것이 마음이 걸렸다. 대학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이버대학교에 문의했다. 또 한 번 놀라는 일이 생겼다.
내가 중졸이었다. 대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이 말을 하려면 다시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아이가 없는 작은집에 양녀로 보내졌다. 양녀를 이해 못 하는 나에게 엄마는 배정원서를 잃어버려 중학교에 못 간다고 했다. 나는 그대로 믿고 예쁜 옷 사주고 공부시켜준다는 숙모를 따라갔다. 그래서 국민학교 졸업식에 가지 못했다. 숙모는 양장점을 하셨다. 밤 열두 시는 되어야 집으로 오셨다. 나의 중학생활은 엉망이었다. 교복은 기성복이 아닌 양장점에서 만들어주셨다. 허리가 잘록하고 치마 길이도 길다. 천도 교복천이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정상적으로 등교하는 아침은 교문에서 선도에게 잡혀 벌을 섰다. 밤에는 잠을 못 이겨서 숙모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차비를 탈 수 없었고, 아침에는 곤히 자는 숙모를 깨울 수 없어서 차비를 타지 못했다. 일찍 학교 가면 복장 불량으로 선도에게 잡히고, 버스비도 없으니 걸어가서 지각을 했다. 여름방학 때 오빠가 작은집이라고 놀러 왔다 내 꼴을 보더니 당장 집에 가자고 짐 싸라 했다. 그렇게 오빠를 따라 다시 서울 집으로 왔다. 그때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다. 나머지 반년은 그냥 놀았다. 다음 해에 내가 배정받은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2학년이 되었다. 서울 옥수동 우리 집이 재개발로 철거가 되었다. 가족들은 나를 먼 친척집에 두고 고향인 대구로 갔다. 그 집에는 아기가 연년생으로 네 명 있었다. 업어야 하고 안아야 했다. 교회 목사님 집이었는데 친절했다. 그러나 친절한 것 하고 아이 보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다. 겨우 중학교 졸업을 했다. 아니 졸업만 했다. 또 졸업식에 참석 못하고 대구 집으로 내려왔다.
대구에 내려오니 엄마가 분식집을 하고 있었다. 이름도 아직 기억난다. 일일 분식. 부모님은 나를 고등학교에 보낼 의사가 없었다. 여자가 공부는 해서 뭐하냐고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서울에서 중학교를 너무 힘들게 다녀서 ‘그래 될 대로 돼라’ 포기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고등학교에서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가고 싶어 하던 예일 여자 고등학교였다. 그 학교는 교복이 너무 예쁘다. 내 실력이 모자라지만 시험이나 쳐 보자 하고 쳤던 것이 합격한 것이다. 기뻤다. 그리고 슬펐다, 작은방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다. 오빠는 대학 가고 나는 왜 고등학교도 못 가냐고 삼일을 울었다. 오빠는 내편이 되어 여자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엄마를 설득시켰다. “아무 고등학교라도 갈래?” 아버지가 나를 달랬다.
아버지를 따라 산 위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다. 교장실에서 내려다보니 운동장에 학생들이 줄지어서 있다. 그날이 입학식 날이다. 모두 남학생인데 제일 끝에 여학생이 한 줄 서있다. 교장선생님이 아버지 친구 분인데 오늘부터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나는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교무실에 급사를 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3학년이 되면서 백화점에 취직했다. 그 학교는 인가가 안 난 학교라서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학교를 안 가는 것 하고 갈 수 없는 것 하고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 망설이지 않고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책사고 동영상 시작하려는 중에 평생교육원에서 2년 과정 고등학교를 알아냈다. 다행히 코로나 기간이라서 비대면 수업이 많다. 우습게 코로나가 나에게 공부할 기회를 줬다. 이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올해 한남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과목 중에 고전 읽기 과목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당연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그중에 한 대목을 자연스럽게 인용한다.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였다. “행복이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 자체이다. 모든 좋음들 중 최상의 것이 행복이며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동시에 행복은 가장 완전한 것이다.”어쩌면 지금이 내 본성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취업을 걱정할 때 취업 걱정 안 해도 되고, 그동안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았으니 나를 위해 등록금 정도는 써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취직해서 잘 살기 위해 공부하는 것보다 정말 공부하고 싶어서, 배우고 싶어서, 재미있어서 공부하는 지금이 나에게는 가장 딱 맞는 공부할 시기인 것 같다. 봄이 오면 당연 여름 가을 겨울이 오듯이 나도 4년을 당연하게 잘 다녀서 빛나는 졸업장을 품에 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