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 가족 이야기
1950년 1월 1일, 경향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던 '최영수'는 새해를 맞아 아내, 세 아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방정국이 혼란스럽지만 그의 삶은 안온했다. 멀쩡한 직장도 있겠다, 든든한 아이도 셋이나 있겠다, 얼마 전에는 막내딸도 태어났겠다... 집 안에만 들어서면 그는 안도감과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수줍게 남편을 바라보는 어린 아내도 그랬겠지.
‘1950년 1월 1일 서울 혜화동 우리집에서’.
그는 사진 뒤에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6개월 뒤, 7월 13일.
최영수는 납북되어 영영 사라진다.
사진 속 '아빠'는 최영수(崔永秀·1911~?)로,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塾)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수필가, 만화가 등 문인으로 활동했던 언론인이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에서 미술기자로 활동하며 만화, 삽화, 수필을 제작했고 이후 경향신문사로 옮겨 출판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납북되었다.
미술기자들의 삽화에 대한 전시를 기획하며 그의 행적을 좇던 중 그의 아들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고, 오전 내내 생각이 나고 마음이 아파 브런치에라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아래는 내가 읽었던 동아일보의 기사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뿔테 안경을 쓴 멋쟁이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을 양팔로 꼭 안았다. 단정하게 쪽 찐 머리를 한 어머니가 아직 돌도 안 된 막내딸을 어르는 순간, 카메라 셔터가 찰칵 눌렸다. ‘1950년 1월 1일 서울 혜화동 우리집에서’. 그렇게 찍은 사진은 마지막 가족사진이 된다.
최영수(崔永秀·1911~?) 씨는 수필가, 만화가, 시나리오 작가, 유머소설가, 영화제작자 등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한 언론인이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신동아부 소속으로 ‘신가정’(現 ‘여성동아’)을 편집하며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수필을 쓰고 만화와 삽화 등을 그렸다.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사 초대 문화부장 및 출판국장을 지냈다. 신동아 복간호인 1964년 9월호에 실린 좌담회 ‘옛 新東亞 시절’에는 최영수에 대한 회고 한 토막이 나온다.
아니, 왜 그 생각나세요? 어디서 나병환자가 글을 써 보냈는데, 최영수 씨가 하두 깔끔해서 장갑을 끼고 소독한 젓가락으로 원고를 넘겼지요…(웃음).
최씨는 “집안 어른들이나 아버지 친구 분들은 아버지가 ‘늘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던 유쾌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너무 어릴 때라 생각나는 게 없지만, 혜화초등학교 1학년이던 형 최규재(崔圭哉·1944~?)는 아버지가 끌려가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고 한다.
“몇 명의 남자가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를 끌고 나갔대요. 그들의 베잠방이 주머니가 불룩했는데, 그 안에 검은색 권총이 들어 있는 걸 언뜻 봤대요. 아버지가 ‘민주경찰’이라는 월간지에 만화와 수필을 썼거든요. 집에 그 잡지가 죽 꽂혀 있는 걸 보고 그들이 ‘어? 민주경찰?’ 했대요.”
아버지가 납북된 이유에 대해 그는 “소설가 정비석 선생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최후의 밤’이라는 반공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는데, 아마 그 때문에 사상범으로 몰린 게 아닌가 싶다”고 추측했다.
남은 가족은 부친의 고향 경기 안성으로 내려와 살았다. 경기여고 출신 어머니는 친정오빠가 마련해준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고, 봉투를 부치고, 참기름을 팔아 세 남매를 키웠다. 큰 집의 주인이었지만, 건넛방에 세 들어 사는 가족보다 훨씬 가난했다.
“아버지 흔적을 찾을 때마다 기쁘다”며 그는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눈보라의 운하·기행문’(푸른사상)이라는 책에서 소설가 박화성은 이런 구절을 남겼다.
6월 7일 아침에 나는 최영수 씨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저희들 지금 흑산도에 갔다가 오는 길인데 꼭 박 선생님 만나고 싶군요. 어떻게 하면 뵈올까요? 백철 씨하고 전화 바꿉니다.”
그는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 이 대목을 또박또박 읽으며 책장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자취를 이런 식으로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애들은 저렇게 어린데 남편은 끌려가고, 얼마나 막막했을지. 그 시절 경기여고 출신이면 얼마나 고생 모르고 자랐을 텐데 하루아침에 맞이하게 된 전쟁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녀는 책에서, 음악에서, 미술에서 눈을 돌려 바느질과 봉투 부치기에 전념해야 했을 것이다.
또 눈물 나는 부분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아들 최영재 씨의 모습. 아빠에 대한 추억이 없으니, 말을 들은 기억도 없을테고. 소설에서 아빠의 통화내용을 적은 구절이 나올 때 반가워하는 모습이 정말 가슴 아팠다. 나이 일흔 넘은 교장 선생님이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때면 신나서 어린 아이가 되는 것 같은 느낌.
근대기 공부를 하다 보면 나름 근대 사회를 거치면서 고도화되었던 한반도의 문명, 교양, 생활 수준, 품위, 예절... 이런 intangible한 가치들이 전쟁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곤 한다. 결국 우리 사는 건 다 똑같은데, 그만큼 전쟁은 한순간에 그런 가치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인간의 수준을 낮춘다는 것이지. 단순히 먹고 입을 게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심리적, 사회적 관계와 장치들이 사라진다. 그게 자연재해도 아니고 사상싸움과 인간들끼리 만들어낸 투쟁 때문이라는 것이 소름 돋지 않는가. 나는 그래서 정말 전쟁이 싫다. 시리아 전쟁 때 어딘가에 보도된 사진이었을텐데, 폭격으로 먼지와 피를 뒤집어 쓴 이름모를 아기의 허망한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cf. 엊그제 누가 왜 근대라고 안 하고 근대기라고 하냐고 물어보던데; 진짜 생각해 보니까 고대, 현대라고 하지 고대기, 현대기라고 안하잖아…? 근대기라고 하는 이유는 그냥 논문에서 다 근대기라고 하니까 그러는 거 같네요ㅋㅋㅋㅋ )
아들 최영재 씨의 말과 시를 인용하면서 이만 글을 줄여보겠다. 납북의 순간으로부터 최영재 씨의 가족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최영수는 납북 이후 탈출하려다 체포돼 처형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영재 씨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한 세월 지났으니, 다음 생애에서는 (또는 저 세상에서는) 전쟁 없고 납북 없는 따뜻한 가정 속에서 다시 행복하게 자라나시면 좋겠다.
“제 책이 납북자 가족에겐 작은 위로가, 어린이들에게는 전쟁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전쟁이 준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아요.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걸, 어린이들에게 꼭 얘기하고 싶어요.”
“아버지, 아버지…!” / 아버지가 달아날까 봐 끌어안고 흐느끼는데 / 또 꿈이다
하도 많이 속아서 / 이젠 꿈에 아버지를 만나도
놀랍지도 / 반갑지도 않다.
-‘꿈’ 중에서
* 내가 봤던 동아일보의 최영재 씨 기사(2016)
https://shindonga.donga.com/culture/article/all/13/538035/1
* 최영재 씨가 남긴 납북자 증언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