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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Apr 03. 2024

은입사 투구의 비밀

전쟁 포로로 붙잡힌 두 왕자

  서울 호림박물관 신사동 분관에서는 용이 그려진 조선시대 은입사 투구가 한 점 전시 중이다. 개인소장의 이 투구는 더 이상 털도 없고 가죽도 없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용의 발톱은 4개,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 상대적으로 투구의 크기는 자그마하여 어린아이의 투구 같기도 하다.

철제 금은입사 쌍용문 투구, 조선 16-17세기, 개인소장 (사진촬영: 장해림)
철제 금은입사 쌍용문 투구, 조선 16-17세기, 개인소장


  그리고 이와 동일한 형태의 투구가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높이 26.7cm의 이 투구는 1878년 일본에서 입수하여 유물번호는 118-1878 이며 해당 박물관 한국 컬렉션 중 상당히 초기에 입수된 것이라고 한다. 히젠 성의 성주(prince of Hizen)가 1594년 포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은입사 투구(출처: 빅토리아앤알버트박물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은입사 투구(출처: 빅토리아앤알버트박물관)




















높이 26.7cm 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사이즈 비교를 위해 다른 투구의 사이즈를 찾아보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다른 철제투구는 높이 28cm, 지름 22cm (신수 15162)이고 일반 병사의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조선 투구(園胄)는 높이 29cm에 드린 길이 27cm, 그리고 투구둘레 73cm (본관 53-10), 그리고 높이 28cm, 투구둘레 70 cm, 드림길이 27cm (본관 53 - 11)로, 평이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분이 높은 자가 착용했을 하단의 혁제칠갑 투구는 높이 23.7cm에 지름 20cm (소장품번호 신수 467)이다. 이 투구 또한 장수를 뜻하는 ‘帥’자가 앞면에 음각되어 있어 고위층 무장이 착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용이 아니라 봉황문이며 은입사가 아니다.

신수 15162,  28cm x 22cm(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53-11-10,  29cm(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467, 23.7cm x 20cm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육군박 소장의 투구 크기를 쉽게 가늠할 수는 없으나 상대적으로 높이는 높되, 지름은 작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육군박물관 소장의 은입사 철제 투구는 체구가 작거나 최소 머리가 작았고, 장수보다도 높은 신분의 남성이 소유했던 투구일 것이다. 그러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의 투구는 상대적으로 일반 성인 남성의 투구 크기와 비슷하며, 신분은 동일하게 높아 보인다.



누구의 투구일까?

귀한 신분의 어린 남성 둘. 투구를 빼앗길 만큼 긴박하고 굴욕적인 상황.


여기서 우리는 가토 기요마사의 임해군, 순화군 포획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다음은 선조실록 26권에 실린 기사이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16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함경남·북도가 적에게 함락되다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北界)로 침입하니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王子)039) 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당초 청정이 재를 넘어 왕자 일행을 끝까지 추격하니 왕자가 경성(鏡城)으로 도망하였다.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摩天嶺)에서 항거하여 싸웠으나 해정창(海汀倉)이 왜군에게 차단 당하자 군사들이 패하여 도망하였다. 왕자가 진로를 바꾸어 회령부(會寧府)로 들어갔는데 적병이 가까이 추격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鎭)의 토병(土兵)이 이미 모반(謀叛)하여 거짓으로 성을 지키겠다고 청하면서 자진하여 문의 자물쇠를 가지고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토관 진무(土官鎭撫) 국경인(鞠景仁)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는 스스로 대장이라 일컬으며 갑기(甲騎) 5천으로 진(陣)을 결성하였다. … (중략) … 경인이 마침내 객사(客舍)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夫人), 여시(女侍) 노비 등과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과 그들의 가속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器物)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두었다. …(중략)


그리고 여러 진(鎭)과 보(堡)의 토병(土兵)과 호수(豪首)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점령하게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23면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왕실-종친(宗親) / 변란-민란(民亂) / 인사-임면(任免)            

[註 039]  두 왕자(王子) :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요약하자면 지역 토민 출신인 국경인(鞠景仁)이라는 자가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당시 일본의 장수 청정(淸正), 즉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加藤 清正 かとう きよまさ, 1562-1611)에게 넘겼다는 말이다. 3개월 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왕실에 인편으로 왕자들의 서신과 함께 자신의 서계를 전하게 된다.


KBS 드라마 <징비록> 중

                


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 10월 19일 을사 5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경성 판관 이홍업이 가지고 온 적에게 잡힌 왕자 및 적장의 편지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이 오랫동안 적에게 잡혀 있다가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호군(護軍) 황혁(黃赫)의 서장과 적장 청정(淸正)의 편지를 가지고 적중으로부터 성천(成川)에 도착하였다. 동조(東朝)의 신하들이 사람들이 놀랄까 두려워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는데, 대간이 이를 논하여 행재소로 압송해 왔다. 흥업이 아뢰었다.


"평조의(平調義)의 말을 듣고서 나왔는데 평조의가 ‘조선이 땅을 떼어 강화(講和)하면 왕자도 되돌려 보내고 군사도 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극함과 영 등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 차정(差定)되어 나온 장수 중 한 사람인 청정(淸正)이라는 장수가 이번에 신들을 불러 ‘일본이 조선과는 오랫동안 인국(隣國)의 수호를 닦아왔으므로 당초부터 다투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대마 도주(對馬島主) 종의조(宗義調)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두 나라의 서계(書契)에 막히는 것이 많아졌고 피차의 사이를 이간하기까지에 이르렀으므로 이미 죄를 받아 복주(伏誅)되었다. 당초 우리 나라의 군사가 온 것은 대명(大明)을 바로 침범코자 하여 귀국의 길을 잠깐 빌리고 또 선도(先導)가 되어 주기를 청하여 군행(軍行)이 편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런데 변방을 지키는 신하들이 이런 뜻을 알지 못하고 부산 등지에서 먼저 무기를 썼기 때문에 난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원래 살상을 즐기는 마음이 없어 지나는 성읍(城邑)에서 한번도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관방(關防)을 파수하던 사람 중 현재 사로잡힌 자는 모두 완전하게 보호하고 있고 임해·순화 두 왕자도 모두 예로써 접대하고 있다. 이제 듣건대, 대왕께서 서쪽 지방에 계시어 다시 통신이 되지 않고 있다 하는데 이는 의심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 불과하다. 관백(關白)이 이국(異國)에 대하여 막아 싸우려는 나라는 쳐서 멸망시키고 강화하려는 나라와는 굳게 우호를 맺고 있다. 귀국의 군현(郡縣)은 거의 일본의 소유가 되었으나 대왕이 다시 인국(隣國)과의 맹약을 맺으려 한다면 그중 한두 도(道)를 귀국에 돌려줄 것은 물론 전처럼 신의를 지킬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을 갖추어 대왕께 진달하도록 하라. 평안도에서 사신을 보내어 답장을 보내되 좋은 뜻으로 허락해 온다면 곧바로 관백에게 아뢰어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겠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두 왕자와 배행한 대신들을 모시고 함께 안변(安邊)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말을 대략 갖추어 알립니다."】


진(珒)과 보·귀영·정욱·혁 등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혁 등이 지난 7월 24일 회령부(會寧府)에서 사로잡혔으나 그 일의 곡절을 치계할 길이 없어 혼자 속만 태울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일행이 안변부에 압송되어 와 머무르고 있은 지 이미 한달이 되었습니다. 왕자와 대소 일행의 제관(諸官)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다른 것은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일본의 장군이 행재소(行在所) 등을 다그쳐 묻기에 ‘6월 초순부터 길이 막혀 알기가 어렵다. 지금 어느 곳에 계신지 알 수가 없는데 틀림없이 이미 요수(遼水)를 건넜을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지난번에 이 도(道)에 계셨다고도 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또 ‘일본은 별로 다른 뜻이 없다. 일국에 임금이 없을 수 없는데 앞서 대마도주의 일처리는 극히 사리에 어긋났고 신의를 크게 저버린 것으로 본국까지도 속이려 들었다. 당초 응당 형벌이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런 유는 아니다. 단지 당신네 나라 국왕이 언지(言旨)를 차분히 지켜 2∼3도(道)로 경계를 삼아서 국경을 나누고 군사를 파할 것은 물론 양국의 강화를 논하고자 한다. 모름지기 재상 중에서 한 사람을 파견시켜 함께 편부에 대해 의논케 하라. 만일 의심스러워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의논한 뒤에 다시 당신에 국왕에게 품의(稟議)케 하고 또 처자(妻子)를 볼모로 들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 군주의 인신(印信)이 적힌 문서를 내보였으나 맹랑한 것으로 준신(準信)할 것이 못되었는데도 그는 매우 믿을 만한 것이라 하였습니다만 합당한 문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지금 계신 곳을 알지 못하니 사람을 시켜 찾아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을 하기에 감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품의합니다. 또 일본의 장군이 지난번 치장(馳狀)하게 한 까닭에 영흥(永興)과 문천(文川) 두 고을에서 함께 서장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었었습니다. 또 북병사(北兵使)와 남병사(南兵使) 등도 별도의 서장을 부송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일본과 우리 나라가 2백 년 동안 화친하여 정의가 두텁지만 일본의 관백은 그 사유를 일찍이 알지 못하였었는데 이번에 관백이 이런 기별을 듣게 되면 반드시 좋게 받아들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장군의 말로는 이상의 의제들을 하나하나 조목별로 의논하여 타결될 만한 것들을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장군의 서계 1통을 아울러 첨부하여 올리니 참고하소서."】


적장 청정(淸正)의 글은 다음과 같다.  


【"지난 7월 23일, 회령부에서 두 왕자와 관원들을 체포하여 지금은 안변부(安邊府)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지난 일들을 들어 보니 2백 년 이래 일본과 이웃하여 사이좋게 지냈다 하였는데, 일본 국왕은 알지 못했던 말입니다.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가 사사로이 이런 논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 듣건대 근세(近歲)에 혹 전산전(畠山殿)이니 세천전(細川殿)이니 일컫기도 하고 혹 우우무위(尤右武衛)라 일컫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때문에 두 나라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고 조선은 폐망하게 된 것입니다. 아, 이보다 더한 후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듣건대 국왕께서는 평안도에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왕자군(王子君)이 잡혔다는 소식이 전달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 또한 전일 영흥 고을에서 글을 올렸었는데 이다지 전달되지 못하였단 말입니까? 그러나 국왕께서 그 도에 계신다 해도 전부터 우리의 군사가 이르면 우리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이른바 원려(遠慮)가 있는 자에게는 목전의 근심이 없다는 말이 지금의 상황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나에게 협화하여 따라 주신다면 내가 일본의 관백공에게 아뢰어 나라의 고을을 나누어 주어 부자가 함께 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또 이 말이 믿기지 않거든 사신을 보내면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들을 주달할 따름입니다."】



【태백산사고본】 15책 3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57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왕실-종친(宗親)            





위와 같은 기사로 미루어보건대, 임해군(1572년생)과 순화군(1580년생)은 각각 만 20세, 만 12세였던 1592년 7월 23일 체포되었고 이듬해인 1593년 8-9월 경 1여년 간의 포로생활 끝에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임해군은 9월 24일 본인의 구출에 힘썼던 명나라 경략(經略)이라는 위치의 장수 송응창(宋應昌)에게 사례를 하기도 했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24일 을해 3번째기사) 임해군과 순화군은 중국 장수의 향도장(嚮導將) 최우(崔遇)가 오니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고 (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4일 기미 7번째 기사) 적장에서 왕실로 상황을 전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선조 26년 5월 14일 정묘 1번째 기사) 여러모로 상당히 고달픈 포로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토 기요마사는 히고국(肥後国, 현 규슈 구마모토 현)의 다이묘였는데, 빅토리아앤알버트 박물관의 수장품 문서에 따르면 투구는 히젠국의 성주, 즉 히젠의 다이묘가 포획한 것이라고 했다. 그럼 이들은 동일인물이 아닌 것일까?


우선 히젠 성이라고 하면 현재 사가현의 나고야에 위치한 나고야 성(名護屋城)을 일컫는데,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직전 (1592년 음력 2월) 출병기지로 삼기 위해 새로 축조한 성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히젠의 성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고, 임진왜란 이후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1563- 1633)가 비로소 다이묘로 다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히젠국(肥前国)은 나가사키 맨 끝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본래 히국(火国/肥国)이 8세기 경 히젠국과 히고국으로 나뉜 것이라고 하며, 히젠과 히고는 함께 종종 히슈(肥州)라고 불리는, 지리적으로도 인접한 지역이다.


히젠과 히고를 혼동해 히고 성주였던 가토 기요마사를 히젠 성주로 적었거나, 히젠과 히고를 같은 지역으로 치환해 기록된 것은 아닐까?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이 일본에서 해당 투구를 입수했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면 더 명확해질 듯 하다.

만일 가토 기요마사가 실제로 두 왕자를 포획할 당시 얻은 투구 두 채가 맞다면, 어떻게 하나는 1878년에 런던으로, 하나는 불명의 시기에 윤장섭의 호림박물관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것일까?


가토 기요마사의 가토 가문은 히고 성을 지키지 못하고 아들 가토 타다히로(1601-1653) 대에 막부에게로 넘기게 되었으나 그 후손은 숙청당하지 않고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한 무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영웅담을 고려해볼 때, 아무리 가토 가문이 아들 대에서 몰락했다 할지라도 쉽사리 조상의 전공(戰功)을 상징할만한 투구를 팔아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묘들의 위신이 크게 몰락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메이지 유신 시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토 가문의 후손에게서 나왔을 두 투구는 특정한 경로를 통해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만 20세이던 임해군의 일반 크기 투구는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으로, 만 12세이던 순화군의 작은 투구는 서울의 호림박물관으로 흘러갔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호림박물관 소장 투구와 빅토리아앤알버트 박물관 소장 투구의 은입사 기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시기는 유사하지만, 형제를 위해서 보통 한꺼번에 주문했을 투구가 조성기법이 다르고 심지어 수준 또한 달라보인다는 것은 상당히 찜찜하다.


후속 연구를 통해 더 알아보고 싶다.


* 본문의 글은 장해림에게 저작권이 있으며 무단 도용 및 배포를 금지합니다. 정당한 범위 안에서 일부 출처와 이름을 명시한 인용은 사전협의 조건 하에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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