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deology of the Gallery Space 3, 4장
* 본고는 Brian O’Doherty, Inside the White Cube: The Ideology of the Gallery Space, Santa Monica, San Francisco: The Lapis Press, pp. 13-64를 바탕으로 쓴 서평이다.
천장이란 무엇인가? 모더니즘 이전의 천장은 일루져니즘 벽화가 그려져 하늘을 상징하기도 했고, 대부분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졌다. 그러나 조명이 들어오면서 모더니즘 속 천장은 공간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다 처음 천장의 가능성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마르셀 뒤샹이다. 1938년 프랑스 보자르 갤러리에서 열린 the International Exhibition of Surrealism에서 뒤샹은 <1,200 Bags of Coal>을 발표하는데, 천장에 석탄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아무도 증명하지 못하는 자루가방을 1200개 붙여두었다. 사실 1200개인지도 모른다. ‘제목이 그러하니 그런갑다’라는, 지극히 교과서 암기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맞는 자세를 조롱한다. 그러나 관객은 왜 증명도 하지 않은 채 이에 동조할까? 갤러리 공간을 거꾸로 뒤집는 ‘제스쳐’를 통해 튀샹은 공간의 안팎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전시공간이 주는 힘은 이토록 강하다. 감히 그 공간 속에서 관중은 시험해보고자 하는 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전체주의 나치즘 속에서 국가에게 의문을 갖지 못하고 수용하는 국민과 비슷하다. 1938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예술을 시간순으로 분석하는 이상 이렇게 정치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 흐름을 시대적 상황과 연결시켜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1942년 First Papers of Surrealism 전시의 <Mile of String>은 초현실 공간 속에서 관객에게 살얼음같은 분위기를 선사한다(hostility). 기둥과 기둥, 천장과 벽 사이에 실을 어지럽게 감았지만, 절대로 공간을 가로지르지는 않으며 일종의 질서가 존재한다. 전시공간이 회화작품 속 공간으로 해석되어, 프레임을 없애고 프레임의 기능은 전시공간으로 전이된다. 오도허티는 이를 회화적 관습의 물질화(actualization of a pictorial convention)라고 설명했다.
모더니스트 작가들은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아방가르드함으로 적대감을 양성하고,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는 서열이 생겼다. 모더니즘 전의 예술은 관람자가 곧 후원자였기 때문에 정반대였지만,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함은 무질서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작품을 전시해 관객과의 괴리를 관객이 작품에 다가갈수록 튕겨져나가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예술이었다. 마치 비스마르크와 같이 군사적이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와 같은 호전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42년은 한창 세계2차대전에서 추축국이 승승장구할 시기였다. 전쟁 속에서 강한 지도자의 군대만이 효율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모더니즘 시기에는 호전적인 예술가가 ‘잘팔렸다’고 오도허티는 적었다. 그렇다면 후기 모더니즘이 19세기 부르주아 후원자들에 의해 장악된 살롱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민주주의의 발전와 궤를 같이 한다. 다양한 계층의 장르들, 혼합 장르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퍼포먼스, 탈미니멀, 비디오아트, 등등. 케네디가 국민들과 소통해 인기를 얻듯이 작가는 관람자와 소통해야 한다. 70년대 예술의 관객은 더 이상 관람자(spectator)가 아니다. ‘소통’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대안공간이 등장했다. 오도허티는 관계의 역전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데, 갤러리의 벽은 작품에 동화되고, 그 동시에 작품은 마침내 해방(discharge)된다는 것이다. 갤러리 공간은 더 이상 중립적(neutral)이지 않으며, 흰 갤러리 벽은 보편적 사상과 추측을 담은 공동체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 속에 작가와 관람객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벽이 작가를 반영하는 것은 살롱 때는 도통 불가한 것이었다. 작품은 스튜디오에서 창작되어 어떤 갤러리로 옮겨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창작 단계에서 전시공간을 생각하지 못한 채로 창작된 작품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옮겨졌을 때 과연 벽, 전시공간이 작가를 반영할 수 있을까? 과거에 비해 현대의 작가들은 전시 이전에 갤러리에 와서 조명도 살펴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여러 주문을 할 수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흰 벽만 존재했다면 지금은 (큐레이터가 정하기도 하지만) 시트지도 붙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사망했거나 하는 등 작가가 건드릴 수 없는 전시공간은 과연 작품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어차피 전시기간이 지나면 그 자리는 금방 다른 작품으로 대체되어 관람자와 다시금 새로운 형태의 소통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전시공간을 조정하려는 작가의 전시 전(pre-exhibition)적인 시도가 행해지면 큐레이터의 역할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시나 소설이 교과서에 등장할 때 시와 소설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어떤 삽화가 들어가고, 어떤 선생님이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텍스트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소설이 인용된 기출문제를 풀었다가 틀렸다고 했다. 이런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봐야할까? 언론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발언이 어떤 매체에 실리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내가 옳고 그름을 가르지는 못하겠다. 그 이유는 특정한 텍스트가 여러 갈래로 해석되는 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이고 자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말의 정확한 의도를 알지 못한다. 플라톤이 해석한 걸 보는 것이고, 플라톤을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플라톤을 배운다. 창작자의 권한은 스튜디오까지이지 않을까. 어떻게 전시되는가의 문제는 큐레이터의 몫이며, 흰 갤러리 벽은 전적으로 모더니즘 시대 무명으로 남으려던 큐레이터의 익명성이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최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려 하지 않았던 큐레이터의 머뭇거림이 바로 흰 벽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개입과 오독이 싫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창작물을 해명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경우도 있다. 창작자가 나서서 어떤 조건의 공간에서 전시할지 고민하는 것은 그러한 경우일 것이다. 창작자가 애초부터 ‘해석될 여지 없이’ 순수하게 작품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면 된다.
오도허티에 따르면 <몬드리안의 방>은 갤러리 공간의 새로운 대안이다. 해당 작품은 1970년 제작된 것으로 무작위적인 작가의 독창성을 드러내며, 건축, 조각, 회화가 통합된 전시가 가능함을 알려준다. 공간이 필요없는, 공간 자체가 되어버린 이 작업은 앞서 언급된 뒤샹의 전시와 달리 호전적이지도 않고, 관람객을 독재하지도 않는다.
오도허티는 또한 갤러리 공간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에서 발달하여 그동안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여겨진 것들을 보존하는 공간 또한 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미술시장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은 높이 평가받는다. 사회적 메시지/ 철학을 담은 PC한 작품을 해야할 것만같은 막중한 책임감이 작가들에게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되었다. 오도허티는 이런 행태를 뉴욕식 사고방식과 유럽식 사고방식으로 구분하는데, 그에 따르면 뉴욕식 사고는 예술가를 감각덩어리로 생각하여 이상주의자나 유토피아 추종자를 쫓아버리는것이고, 유럽식 사고는 유토피아를 추종하는 것으로 예술의 개념 자체에 토의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자신의 개성 때문에 사회구조에 부응해야할 규칙을 깨뜨린다. 몬드리안과 말레비치는 유럽식 사고의 대표주자로 예술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제시한 것관ㄴ 달리 대중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반면 타틀란은 이런 이상에다 사회변화를 추가로 일궈냈다. 리시츠키는 이 두 부류를 융합하여 최초로 갤러리 공간에 주목, 현대적 전시를 창조했다. 관람자 대중을 드디어 전시 공간에 들여놓는 데에 성공했다.
제 4장 <제스쳐로서의 갤러리>는 기존 연재분에는 없던 것으로, 차후에 덧붙여진 내용이다. 따라서 오도허티의 변화된 또는 더 정리된 관념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4장에서 도허티는 갤러리를 통제하고 이용하는 제스처를 통해서 갤러리의 방향이 정해진다고 주장한다. 제스처는 50년대 후반, 60년대 New Realists로부터 시작됐는데, 사회의식을 담은 작품들이 상당히 영향력 있었기 때문이었다. 앤디워홀이라는 현대미술의 거장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미국식 물질주의, 뉴욕의 제스처는 오브제를 포기하지 않고 맨바닥에서 시작한 정신이 깊이 배어있다. 부렌이 갤러리를 폐쇄시키는 것에서 문득 코로나 때문에 폐쇄되고 인터넷 공간에 둥지를 튼 새로운 갤러리가 생각났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시적인 스크린에 덜렁 떠 있는 작품은 어떻게 관객과 소통하고 있는가? 크리스토와 장클로드 부부는 현대미술관을 포장하는 제스처를 통해 공간 개념을 뒤집어 엎어버렸다(말그대로 쌈을 싸먹어버렸다). 갤러리공간을 예술의 변형으로 삼은 것이다.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가버린 갤러리 공간은 또 어떤가. 관람자는 액정을 통해 관람하는 것 자체로 크리스토와 장클로드 부부가 개시한 예술의 행위를 하게 되었다. 오도허티는 글을 마치며 어려운 현대미술의 종말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현대의 현대미술이 과연 제대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는가? 문턱은 아직도 낮지 않다. 앞으로의 현대미술은 액정공간과 더욱 더 많은 interaction을 주고받아야 할 것이다. 코딩을 배우고 있는 큐레이터도 있다고 들었다. 큐레이터는 이제 프로그래머도 되어야 한다. 갈 길이 점점 멀어진다. 하지만 그만큼 공간과 예술이 상생발전할 기회는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