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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담 Aug 21. 2023

[시를 소개합니다]05. 생일 - 김소연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식기를 가지런히 엎어 두고

물기가 마르길 기다리듯이


푸릇한 것들의 꼭지를 따서 찬물에 헹군다

비릿한 것들의 상처를 벌려 내장을 꺼낸다


이 방은 대합실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파리함과 피곤함을 지나쳐 온 사람이

기다란 의자에 기다랗게 누워 구조를 완성한다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 아침상을 차린다


나쁜 일들을 쓰다듬어주던

크나큰 두 손이 지붕 위에서 퍼드덕 거릴 때

햇살이 집안을 만건곤하게 비출 때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을

간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돕고 있다


살점을 떼어낸 듯한 묵상이

눈물처럼 밥상에 뚝뚝 떨어진다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은다


-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中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을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들었을 때, 오랜만에 나는 미역국이라 답했다.


누가 내게 살면서 가장 슬펐던 때가 언제냐고 물어봐준다면, 

나는 아빠가 끓여준 미역국이 맛이 없었을 때요, 라고 말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이고 싶다. 


가장 그리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엄마가 해줬던 매일의 밥상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매일 아침 달그락거리며 만든 밥으로 빚어졌다.


혼자 살면서 냉장고에 식재료들을 몇 개 채워봐도, 신선칸에 넣어둔 채소들은 서서히 문드러져 갔다.

무성해졌다가 꺾어 온 순간부터 결국 상해가는 것들을, 그런 것들을 싱싱한 그 시기에 손질하여 밥상으로 낸다는 것이,

그걸 먹은 내가 피가 돌고 살이 돋았다는 것이, 기적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아직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사람다움에 지쳐가는 사람다운 사람이 먹고 사는 것.

그제야 무릎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되는 것. 당신의 아침상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끓여준 미역국을 더이상 먹을 수 없던 나의 생일이 살면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고

아직은 살 날이 한참 남은 내가 허기진 마음에 고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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