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일 : 22.06.18
'인형의 집'이라는 원작 소설을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만들어진 우란문화재단의 연극 인형들의 집, 정확히는 인형(들)의 집. 고백하자면 나는 원작 소설인 '인형의 집'을 읽지도 않았고, 정보 없이 극을 마주하는 걸 좋아해서 정말 소개 페이지의 시놉 외에는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관람했는데 오히려 관람 후에 원작도 읽어보고 싶어졌을 정도로 굉장히 흥미롭게 관람했다. 관람 시간이 125분으로 안내되어 있는데 그렇게 길었나 싶을 만큼!
원작 소설에서 '들'이라는 단어가 제목에서 추가된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연극을 보고 나면 모두가 각자 하나의 인형처럼 역할을 수행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노라를 가장 주목해서 볼 수밖에 없다. 인플루언서이자 성공한 사업가, 완벽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노라의 생활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가 들이는 노력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는 정말 행복할까 의문을 갖게 된다. 아니지, 행복-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 마음이 답답해지는 느낌.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했다는 극의 소개를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K-패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불편해할, 누군가는 시원해할, 그리고 또 누군가는 노라처럼 허상을 깨달을 만한 대사와 장면들이 이어진다. 공연장이 편안한 편은 아님에도 대부분 관객들이 다른 관객들의 관람을 위해 꾹꾹 반응을 참는데 이 극은 문득 주먹을 불끈 쥐게 되고 탄식하게 된다. 그 참을 수 없는 지점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현실 반영이 잘 된, 잘 만들어진 극이라는 생각을 했다. 난파된 배, 드레스, 카모마일, 라면 등 참을 수 없는 부분들도 많았고, 광광 소리치며 발 동동하는 씬이 두 번 나오는 데 그 두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오마주 되며 어떤 깨달음이 오기도 했다. 보면서 화가 났지만 동시에 이런 작품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은 그런 양가감정.
우란문화재단의 우란2경에서 관람한 작품이 '네이처 오브 포겟팅'에 이어 '인형들의 집'이 두 번째인데 두 번 모두 무대가 정말 흥미롭다. 예쁘게 만들어진 거실 무대는 우아한 생활을 하는 노라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천장의 화면까지 이어지는 그 구조가 내가 정말 인형 놀이를 하면서 인형 집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특히 실제로 천장 화면에 극 중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며 안을 들여다보는 연출을 한 부분이 있는데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관객도 인형의 집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지만 각자의 인물들도 서로의 인형의 집을 들여다보는 느낌? 그렇게 확장하여 관객도 어딘가에선 인형 집 속 인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는 인형처럼 또각또각 걸어온 시작부터 '당신만 자존심 있는 거 아니야' 외치던 후반부까지, 그리고 인간 노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엔딩까지. 현실은 너무 익숙해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마치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이렇게 현실이 푹 담긴 이야기를 보며 새롭게 현실을 바라볼 수 있어 다행이고, 의미 있는 기회를 주는 좋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