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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솔 깨부맘 Mar 07. 2023

행동하지 않은 생각은 다 소용없더라

생각과 말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그때가 진짜 아는 것이다



  오해일 수도 있겠고, 착각일 수도 있겠다. 자신이 그러하기에 자기도 모르게 남들 또한 어련히 그럴 것이다 하는 생각. 그 생각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내가 먼저 그러했으니 너도 그러하겠지’ 기대했고, ‘어? 아니네? 안 그러네?’ 실망하고, 속상해하거나 섭섭해했다. 그들조차 모르게.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내 안에서 무심한 사람이 되거나, 잘 챙겨주지 않는 사람이 되곤 했다. 내가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을 내 안에서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조차 다른데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고,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었었다.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 환경에 의해 더욱 강화된 관찰력, 직감력, 민첩성, 배려심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부족하게 여기던 나 자신이 그러하니 다른 사람도 어느 순간에 나타나 그럴 것이라고 의심 없이 믿었다.


  믿은 대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기대했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구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 몇 번 그러면 안 그럴 법도 한데 끊임없이 했다. 표현하지 않고, 기대하고, 섭섭해 하기를 수없이 내 안에서 반복했다.

‘너의 변화를 바로 알아차리고, 표현해 줬어. 좋지? 너도 다음에 내 변화를 보고 바로 알아차리고, 표현해 줄 거지?’ ‘너의 미세한 표정을 읽어 감정을 알아차리고, 내가 마음 쓴 거야. 너도 다음에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네가 먼저 알고 마음 써줄 거지?’ ‘네가 지나가듯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준비했어. 너도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이런 기대의 마음이었다.


  이 마음은 관심을 원하는 것이었고, 사랑받고 싶다는 의미였다. 상대가 나와 같지 않은 것은 마음의 크기가 같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기대했던 마음으로 실망감이 들거나 섭섭한 마음이 되었을 때는 상대가 미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초라해졌다. 그러다 상대가 모르게 자존감을 갉아먹고는 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 마음은 내 아이에게도 있었다. ‘엄마가 애지중지 보살피고, 챙겼으니 나중에 아이가 다 알겠지?’ 하는 기대를 했었다. 아이는 기대에 호응하듯 방긋방긋 웃으며 피로가 회복되는 존재가 되었다가 엄마에게만은 좋아하는 것을 나눠주며 함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런 시간이 흐른 후에 아이가 커갈수록 점점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마음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내 안에서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 불안과 초조함이 마구 뒤엉키기도 했다. 아이는 내 안의 마음이 어떠하든 먼저 자신의 상태가 해결되어야 했다. 아이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며 시간이 흘렀다.


  아이와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따로 살다가 결혼이라는 제도로 가족이 된 신랑과도 문제가 있었다. 나는 조부모를 모시며 산 엄마를 보고 자랐고, 본 대로 사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살았다. 똑같이 직장을 다녔지만 집안일과 육아는 내 몫이라 여겼다. 싫은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혼자 힘겨움을 삭였다. 게다가 집안에서 편히 지내야 남자가 기 펴고 산다는 사고방식을 이어받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려 애썼다.


  신랑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프로젝트 단위로 지역을 옮겨 다니며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었다. 타지에서 지내며, 프로젝트로 투입되어 들어간 외부 인력의 힘겨움을 알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그러했기에 내가 감당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로 인해 신랑은 내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힘들게 해내고 있는지를 몰랐다. 말하지 않았기에 괜찮은 줄만 알았을 것이다.


  아이와 신랑의 차이가 있었다. 신랑은 대화를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이고,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라는 것이었다. 


  육아휴직 후 다시 나간 회사에서 좋지 않게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도 주말에만 신랑이 왔고, 평일에는 오로지 나만의 육아였다. 그럼에도 주말에 집에 온 신랑은 되도록 쉴 수 있게 했다. 재미있는 것을 보며 웃는 소리를 들으면서 뿌듯하다가 갑자기 울컥 눈물이 핑 돌았다. 나 역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매일 부족한 잠과 아이를 끊임없이 챙기고, 놀아주다 보니 몸이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피로감이 쌓여 갔다.


  이 생활이 누적되고 4 년이 넘어가던 때, 아이가 처음으로 이유를 알지 못하게 울고만 있었다. 답답함과 괘씸한 마음이 들면서 화가 나기 시작했고, 아이에게 그만 화를 내버렸다. 곧 약한 아이에게 화를 낸 나 자신이 부끄럽고, 우는 아이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상해져 가는 것 같았고, 너무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곪아 병이 난 것 같았다. 나아져야 했다.


  그러다 찾은 방법이 한국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 진학이었다. 4년간 아이의 밥, 간식, 기저귀를 담은 가방과 공부할 책가방을 메고 들었다. 아이마저 안거나 엎고 다니며 공부했다. 한 번씩 아이를 맡겨야 할 때면 시어머님께서 맡아주셔서 감사히 실습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4년 만에 졸업을 했다.


  이후에 두뇌코칭 선생님으로 취업을 했다. 그제야 경험으로 다져왔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서로가 다름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내 방식이 아닌 우리의 방식을 찾는 노력을 했다. 억지로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된 것을 나와 가족에게 적용하고, 좋은 방향으로 해나가는 것을 반복했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먼저 변하고 있었고, 아이는 덩달아 변하고 있었다. 어른과 아이의 시간은 차이가 있었다. 신랑과는 변한다기보다 둘의 관계가 좀 더 편해지는 것으로 시작됐다. 다툼이 없던 사이였기에 딱히 눈에 보이는 변화보다는 서로의 신뢰감과 배려가 더 쌓였다.


  계속 배우고, 성장시키며 나를 최우선으로 변화시켰다. 브레인트레이너로 코칭하던 아이들을 성장시키면서 자기 확신과 자존감이 쌓여갔다. 살면서 깎아먹은 자존감이 많다 보니 두드러지게 쌓이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존감을 느낄 수 있기 시작했다.




  2019년에 갑작스레 몸의 변화가 왔다. 무엇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고, 누워서 회복해야 조금 움직일 수 있고를 반복하며 일을 다녔다. 이유를 몰랐기에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버티고 버티며 일을 하다가 말하는 것만이 아닌 미소 짓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겨우 출근할 수 있는 정도의 체력이 되고서야 퇴사의 의사를 밝혔다. 회사에서는 내 몸 상태가 핑계로 받아들여졌고, 나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상황을 해결해야 했지만 퇴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져 있었다. 다른 이유까지 말하며 퇴직서를 냈고, 연말이 오기 전에 퇴사를 했다. 그로부터 몇 달간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고, 계속 잠만 자야 했다. 1년을 거의 침대에 있었다. 조금씩 회복하며 앉았다 누웠다 일어나 움직였다를 반복하면서 집안에서만 2년을 꼼짝없이 보냈다.


  2022년 봄, 드디어 내가 ‘자율신경계 조절장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덩달아 함께 왔던 병적인 피로감은 만성피로증후군이었다. 관절 마디마디 아프고, 온몸의 근육이 굳고 뭉쳐있는 증상은 섬유근육통이었다. 24시간, 자는 순간마저도 피곤하고, 여기저기가 아팠다. 힘겨움에 쉬이 잠에 들지도 깊이 잠들지도 못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증상이 호전될 리 만무했다.


  병명을 알게 되고, 한두 달 후 신랑에게 말을 했다. “일상생활도 안 되며, 사는 삶이 지옥 같지만 이겨내고 싶어. 가족이랑 행복하려고 산 삶인데 이렇게 돼서 당신 눈치도 보게 돼. 당신이 좀 도와줘. 그간 많이 도와줘서 고마웠어. 그런데 미안한데 내가 못 하는 몫까지 당신이 더 해주고 도와줘야 할 상황이야. 그리고,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당신 일이라고 생각해 줘. 우리 둘 다 생각을 바꾸는 게 필요할 것 같아. 부탁해.”


  힘겨움에 복받쳐 신랑에게 눈물이 콧물 되도록 울며 이야기했다. 신랑은 아이가 태어나고 몇 년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었는데 그때처럼 내 앞에서 얘기를 듣고 앉아 있었다. 신랑은 눈이 동그랗게 되며 놀란 눈치였고, “그럼~ 그럼~ 힘든 거 그동안 못 알아줘서 미안했어. 내가 더 잘 챙길게. 내 일인데 내가 해야지. 몰라서 못 해주고, 미안해.”라고 말해주어 마음이 놓였고, 처음으로 신랑 앞에 앉아 울었던 날이었다. 




  옛 연인은 참다가 헤어지면 끝나는 관계, 동료도 퇴사하면 자연스레 시간 지나면서 끝나는 관계여도 무관했다. 그러나 가족은 끝낼 수 없고, 함께하는 관계다. 그러다 보니 내가 바뀌어야 했다. 지금은 나와 아이, 신랑에게 내 감정을 진솔하게 전하곤 한다. 때론 지나간 일에서 느낀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미안한 부분이 있다면 사과했고, 오해를 풀었다.


  하루는 아이의 행동에 내 생각과 감정으로 아이를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커서 중학생이 되었고, 내가 몇 번 말해야 행동을 할까 말까 하는 모습이 늘어가면서 무척 답답함을 느꼈고,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다가 아이와 같이 밥을 먹는 와중에 갑작스레 자기 방을 다녀왔다. 의아해서 “왜 갑자기 다녀온 거야?” 하고 물어봤다. 아이는 “생각난 김에 하느라고” 단답으로 대답했다. 이어서 밥을 맛있게 먹는 아이를 보면서 문득 알게 되었다.


  내 안에서 ‘왜 저러지? 이유를 모르겠네,’하며 답답해했던 것과 어디 가서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로 인해 때론 잔소리처럼 아이에게 행동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날 아이의 모습을 보고 알게 되며 생각했다. ‘아이는 곧바로 행동할 수 있는 아이지만, 거기에는 자신의 동기와 의지가 필요할 뿐이었구나. 이유가 있다면 바로 행동하는 행동파이구나. 내가 몰랐던 것뿐이었네. 안 그런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시선으로 봤고, 내 감정으로 아이를 오해했었구나.’


  아이에 대한 오해를 알아차리며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오해했던 부분을 사과하고 바로잡기 위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환히 웃으며 화답했다. “그랬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가까울수록 오해도 실수도 더 많다. 그래서, 더 마음을 쓰고, 쌓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강한 마음에서 건강한 관계가 탄생하니까 이런 나의 행동은 자신을 잃지 않고 사랑하며, 아이가 만나는 자신의 세상에서 좀 더 용기 낼 수 있고, 사람을 믿을 수 있고, 관계를 건강히 맺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아이에게 때때로 반복해서 중요하게 말하는 것 중에는 “말로 표현하는 게 필요해. 자신의 생각, 감정, 원하는 바를 명확히 말로 전해야 안다. 나도 타인도.” “더불어, 생각과 말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그때가 진짜 아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모른다. 나 자신도 타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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