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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달리기 Aug 13. 2022

연애가 하고 싶은 페미니스트인데요

외모에 관한 이야기(1)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외모'입니다.




안녕하세요 사하님. 인간관계가 너무나도 어려운 키키예요.


혹시 ‘손절'이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원래는 주식 용어인데 요즘은 인간관계에서도 자주 쓰이더라고요.


‘인생에서 손절해야 할 사람’

‘손절당하는 사람 특징’

‘관계를 손절하는 중입니다’


포털 사이트에 관계 손절을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 제목들이에요. 정말 다양하지요. 주변에서도 “손절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는 걸 보면, 요즘은 버거운 관계를 지속하는 것보다 손절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최근 오랜만에 친구 A를 만났어요. A는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인데, 어렸을 때부터 할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이었어요. 유머러스한 데다가 털털하고 솔직해서 그런지, 저는 물론이고 또래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은 아이였죠. 게다가 의리도 넘쳐서, 지금까지도 모임 분위기를 리드하고 자리도 직접 주선하고 있답니다.


다만 딱 한 가지, A와 제가 크게 다른 점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종종 제가 상처를 받기도 하고요, 대체 그게 뭐냐구요? 바로 ‘페미니즘에 관한 얘기에요.


A와 만나면 관행처럼 받는 질문이 하나 있어요. “남자 친구 있어?”라는 질문인데요. 연애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는 친구라 저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도, 이 질문은 결코 빠지지 않아요. 저는 그때마다 “아니 없지~야 나도 하고 싶다 진짜”라고 답해요. 내심 씁쓸한 마음을 갖고서요. 저도 연애하고 싶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날은 친구가 제게 대뜸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아니 아직도 없어? 너 저번에 머리 자른 것도 그렇고 이상한 사상 가진 건 아니지?”


말이 턱 막히더라고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는 거예요.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선뜻 입이 안 떼어지더군요. ‘저게 대체 무슨 말이지?’하고 일부러 계속 그 말을 곱씹었어요.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도, 집에 귀가하고 침대에 누워서도. 단물이 다 빠지고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껌처럼, 하루 종일 씹고 또 씹어보았어요.


머리를 짧게 자른 여성이,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게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애써 이해해보려고 했어요. 실은요, 분명 무례한 말이긴 하지만 저도 이런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에요. 제가 숏컷을 한 순간부터 주변 시선이 묘하게 달라졌거든요.


물론 그전에 제 머리가 아주 긴 생머리였으니, 놀랄 수도 있긴 해요. 미용실에 가서 숏컷을 하고 싶다고 말하니 원장님께서 ‘갑자기 왜?’라는 표정을 짓더군요. 저도 모르게 변명을 했어요. 한 번 해보고 싶기도 하고 두피 문제 때문에 자르는 게 좋겠다고 말했죠. 


원장님께서는 숏컷이 귀를 파고 안 파고의 차이라고 하셨는데, 귀를 안 판 게 좀 더 ‘여성'스럽다고 해주시면서 추천해주시더라고요. 처음엔 그렇게 커트를 했는데, 너무 불편해서 나중에는 귀를 파달라 했어요. 그러더니 원장님이 갑자기 난색을 표하시면서 안 파는 게 낫다고 3번이나 저를 설득하시더군요. 하지만 막상 파보니까 마음에 쏙 들었고, 저는 지금도 이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답니다.


제가 숏컷을 하고 얼마 안 돼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2020 도쿄 올림픽에서 한 양궁 선수가 숏컷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논란'이 된 일인데요. 한 네티즌이 "금메달을 딴 건 좋지만, 머리가 짧은 걸 보니 페미니스트인 것 같다. 만약 페미니스트면 지지를 철회하겠다. 페미니스트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파장이 거세졌다고 해요. 그 일로 한동안은 #여성_숏컷_캠페인 해시태그 운동이 활발하기도 했지요.


숏컷이 뉴스가 될 수 있다는 게 짐짓 씁쓸한데요. 문제는 여성 공인이 숏컷을 할 때마다 그게 ‘논란'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모 여배우도, 모 유명 치어리더도 숏컷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곤혹을 치러야 했죠. 이를 한국 언론이 ‘논란'이라고 말하는 반면, 외신은 성차별주의자의 ‘온라인 폭력’이라고 표현했고요.


이런 소식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마치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된 거 같아요. 소위 '이성애 중심' 사회가 정한 규칙을 은연 중에 깬 거 같아서요. 그렇다 보니 가끔은 '괜히 숏컷을 했나?' 싶기도 해요. 사람들이 숏컷을 한 저를 제 친구처럼 생각하면서 볼까 봐요. ‘쟤는 숏컷을 하고 화장도 안 하는 걸 보니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나 보군. 보나 마나 페미니스트겠지.’라고 말이죠. 외모에 상관없이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데 말이에요. 무엇보다 저는 페미니스트지만 연애하고 싶거든요. 숏컷을 좋아하며 비건을 지향하고, 시스젠더이면서 페미니스트인 제게 이성과의 연애는 불가능한 이야기인 걸까요?


친구 A와 만난 날 이후, 저는 계속 고민했어요. 이 친구와 내가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말이에요. 주변에서는 화들짝 놀라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빨리 손절하라고 말하더군요. 솔직히 저도 처음엔 화도 나고 당황스럽긴 했는데요. 단지 이런 이유로 손절을 하는 게 맞나 싶어요. 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게 관계는 아니잖아요.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건 친구 사이에서만 존재하진 않을 거예요. 국민으로서, 인종으로서, 젠더로서 분명한 다름이 이 사회에는 존재하겠죠. ‘여성 인권’을 두고 20대 여성과 20대 남성의 간극이 그 어느 때보다 큰 것처럼요. 생각도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너무나 다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친구와 ‘손절'해야 할까요?


2022년 8월 12일


키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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