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에 대한 이야기(2)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외모'입니다.
안녕하세요, 키키. 오랜만입니다.
키키님은 게임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제가 잘하는 것만 좋아하는 궁색한 버릇이 있어서 게임을 즐기진 않는데요. 초등학생 때만큼은 아침 일찍 깨어나 엄마의 눈을 피해 컴퓨터를 켤 정도로 나름의 게임광이었습니다.
당시 ‘쥬니어네이버’에 들어가면 어린 마음을 홀리는 갖가지 게임들이 펼쳐졌는데요. 저는 특히 ‘슈 게임’을 좋아했어요. 평소에는 평범한 학생인 ‘수희’가 변신하면 슈퍼스타 ‘슈’가 되는, 그 시절 통용되던 스토리로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던 인기 게임이죠.
다양한 슈 게임 중에서도 ‘슈의 뷰티메이커’가 생각나는데요. 스케줄에 맞춰 슈를 꾸며주는 내용이에요. 제한 시간 50초 동안 슈의 까다로운 요구에 맞춰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하고 헤어를 고르다 보면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게임이죠.
그런데 이상한 점은 게임의 선택지에 ‘숏컷’이 없다는 겁니다. 바지도 한 벌밖에 없구요. (네 벌 중 세 벌은 하트 무늬의 쫄쫄이입니다.) 화장을 빼먹으면 점수가 깎여요. 그렇게 옷을 다 입고 나면 슈의 남자친구인 ‘빈’이 점수를 매겨줍니다. 본인도 썩 좋지 못한 패션 센스를 가지고 있으면서 말이죠.
키키님의 편지를 받고 고민해봤어요. 한국에서 ‘숏컷 여성’은 왜 곤란한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지요. 그러다 추억으로 처박아둔 저 게임이 생각났죠. ‘발랄하면서도 귀엽고 여성스럽게’ 꾸며달라는 슈의 요구는, 게임 너머 수많은 ‘여자애’들을 향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슈가 충분히 ‘여성스럽게’ 꾸며야 남자친구에게 인정 받는 기묘한 스토리는 어쩌면 이 사회를 충실히 반영한 한 편의 현대 예술인지도요. 게임의 빈약한 선택지가 보여주듯 한국에서 여성은 늘 단일한 이미지로 존재하길 요구받으니까요. 예쁘고, 순종적인 존재로 말이죠.
‘화장하지 않은 숏컷의 여성 = 페미니스트’라는 수상한 공식이 만들어진 것은 그러한 세상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반발일 겁니다. 안산 선수를 비롯해 머리를 짧게 자른 여성들, 그리고 ‘페미니스트’를 선언한 여성 연예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일종의 협박일 거고요. 게임 속에서 화장하지 않은 슈에게 남자친구가 낮은 점수를 부여했듯이, ‘여성다운 외모와 태도’의 미션을 수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낙인이 찍히는지 보여주겠다는 거죠.
하지만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이 미션에는 함정이 있어요. 어떤 점수를 받든 ‘평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머리가 짧고 화장을 하지 않는 제 친구는 남성 동료로부터 ‘악성 페미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요. 꾸미는 걸 좋아하는 또 다른 친구는 예쁘다는 이유로 스토킹을 당했습니다. 올 초에는 여성 BJ ‘잼미’ 씨가 페미니스트로 ‘몰려서’ 조롱과 성희롱, 악플에 시달리다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머리가 길든 짧든, 페미니스트가 맞든 아니든 상관없이 여성은 판단되는 존재예요. 톰 크루즈도 울고 갈 이 미친 미션 속에서 안전한 여성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복잡한 문제를 인식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차이는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없는 문제잖아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여성의 외모와 페미니즘을 판단하는 인식은 명백히 잘못되었습니다. 안산 선수와 BJ 잼미 씨에게 쏟아진 폭언은 그저 ‘다른 인식’에서 빚어진 ‘성별 갈등’이 아니에요. 왜곡된 인식이 현실의 폭력으로 이어진 것이죠. 차이가 아닌 ‘차별’이고 갈등이 아닌 ‘폭력’입니다. 이것을 세상이 명명할 수 있어야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개인의 ‘해명’ 같은 설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니까요.
그래서 친구와 손절해야 하냐는 당신의 물음에는 선뜻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이 올바른 명명을 해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할 수도 없고, 관계를 당장 포기하라고 할 수도 없고, 상처를 주고받을 각오로 뛰어들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 과정에서 오는 모든 감정과 고난은 당신이 홀로 감내할 몫이니까요.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은 내내 다정하고 용감하리라는 제 믿음을 나눠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저를 봐주시길. 하하.)
편지를 맺으며 매들린 밀러의 소설 <키르케> 속 한 장면을 소개하고 싶어요. 키르케는 ‘마녀’로 불리는 신화 속 인물인데요. 소설에서 키르케는 자신을 ‘순진하고 멍청한 여자’ 혹은 ‘타락한 마녀’로 칭하는 신들을 생각하면서 고민해요. “나는 엎질러진 물을 두고 우는 여자일까 아니면 매정한 여자일까? 바보 같은 갈매기일까 아니면 사악한 괴물일까?”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꼭 둘 중 하나일 필요는 없었다.”
머리가 짧은 여성과 머리가 긴 여성. 페미니스트인 여성과 페미니스트가 아닌 여성. 세상은 우리에게 단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지만 꼭 둘 중 하나일 필요는 없어요. 우리를 이루는 것들은 무수하고 다채로우니까요. ‘연애가 하고 싶은 숏컷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가 키키를 전부 설명할 수 없듯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 더 많은 말을 합시다. 우리를 정의하려는 지겨운 말들이 질색할 정도로 수많은 말을 나눠요. 들려주세요. 당신은 또 어떤 사람인가요?
2022.08.23. 사하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