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에 관한 이야기(1)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안전'입니다.
안녕하세요 사하님, 키키예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글을 씁니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거리고 손가락이 덜덜 떨려요. 좀처럼 마음을 가다듬기 쉽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요? 아주 잠시였지만, 방금 저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왔답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요. 저는 앞에서 두 번째, 두 칸짜리 좌석 중 창가 쪽에 앉아 있었죠. 바퀴가 있는 자리라 앞뒤가 넓고, 바닥이 둥그렇게 올라온 자리인데요. 얼마 안 돼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성이 제 옆자리에 앉더군요. 그런데 앉는 방향이 지나치게 제 쪽인 거예요. 잘못하면 그 사람의 엉덩이와 제 허벅지가 닿을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죠. 재빨리 창가 쪽으로 몸을 붙였는데도, 팔과 허벅지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살이 스치더군요. 그러고는 그가 제 쪽에 있는 둥근 받침대에 한쪽 발을 올렸는데, 기분이 나쁜 걸 넘어서서 긴장이 됐어요. 저는 몸이 왜소한 편이라 보통 창가에 바짝 앉으면 옆사람이랑 닿을 일이 없거든요. 아무리 봐도 제 자리가 침범된 거 같았어요. 그래도 참았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집에 도착하니까요.
그런데 그가 갑자기 왼쪽 주머니로 핸드폰을 집어넣는데, 팔을 어찌나 내미는지 제 가슴 바로 옆에 있는 옆구리를 치더군요. 화들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어요. 아무리 지하철에 사람이 많아도 이렇게 신체 깊숙한 곳에 팔이나 손이 닿은 적은 없었단 말이죠. 옆사람을 배려해서 핸드폰을 오른쪽 주머니에 넣을 수 있잖아요. 심지어 핸드폰을 오른쪽 주머니에서 꺼내는 걸 제가 봤단 말이죠. 저는 수치심을 느낄 정도였는데, 정작 본인은 옆사람을 쳐 놓고 사과를 안 하더군요.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뒷좌석에 가 앉았어요.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내리려고 하는지 일어났어요. 마음 같아서는 신경을 안 쓰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곁눈으로 그의 동태를 살피게 되더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계속 제 쪽을 쳐다보며 걸어오는 거예요. 그것까진 그렇다 쳐도, 제 자리 근처에 있던 봉을 잡더니 저를 빤히 쳐다보더군요. 그러다가 제 쪽으로 몸을 기울여 의자에 손을 올리고 비스듬하게 자세를 잡는 순간, 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어요. 계속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게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 같았달까요. 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는 순간, 손모가지가 날아올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죠.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강압적 시선, 언제 나를 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시선에도 권력이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느낌. 짧은 순간이었지만 너무나도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렸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납니다.
그런데 언뜻, 기시감이 들더군요. 생각해보니 그때 느낀 감정이 처음이 아닌 거예요. 어렸을 적,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한국은 아동 유괴 사건으로 뒤숭숭했었어요. 어느 날은 엄마가 저를 앉히더니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낯선 사람이 엄마 찾으러 가자고 얘기하거나, 같이 어딜 가자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마. 알겠지?”
“왜?”
”네 안전을 위해서야.”
고작 10살의 나이에 안전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조금 어려웠지만, 말은 곧잘 들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내가 말을 잘 들어도, 누군가가 날 따라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밤 10시쯤, 논술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뒤에서 저를 따라오던 남성을 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쓴 남성이었죠. 당시 제가 살던 아파트는 단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래된 빌라촌 사이에 딱 하나 있는 아파트여서, 밤이 되면 집 가는 길이 참 어두웠습니다. 주황색 불빛이 나오는 가로등을 지날 때마다 몰래몰래 뒤를 돌아봤어요. 빛을 지나 어둠으로 막 들어갔을 때가 가장 잘 안 보이거든요. 그때 저는 무서워서 울고 싶고 주저앉고 싶었는데요. 여기서 멈추면 죽을 수도 있다는 본능적인 직감 때문인지, 눈물도 안 나오고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더군요. 왜 아파트마다 입구 비밀번호가 있는지를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어린 시절 귀갓길에 느꼈던 공포감과 최근 버스에서 느꼈던 공포감 사이에는 오랜 시간이 있었음에도, 마치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이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이 사회는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제 무의식에 꾸준히 잠재됐던 거 같아요.
2010년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유괴 청소년 10명 중 9명이 여자이고, 그중에서 여섯 명은 성폭행·성매매를 당합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저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었어요.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불특정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던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그뿐일까요. 여성을 노린 주거침입 범죄는 2020년 9,751건으로 2016년 대비 62%나 증가했지만, 주거침입자 검거율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어요. 교제살인은 어떻나요. 도서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18년 사이에 일어난 교제살인 중 대부분의 여성이 ‘여성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잠자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헤어지자고 했다'는 이유로 죽었습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요. 어떤 날은 화가 나고, 어떤 날은 우울하고, 어떤 날은 불안합니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아무리 내가 조심한다 한들 범죄를 피할 순 없다는 걸 10살에 깨달았단 말입니다.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제 목숨은 제게 달린 것이 아니에요.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이상, 이 사회의 ‘안전'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하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과 ‘안전'이라는 말이, 당신에겐 얼마나 상충되고 있는지를요.
2022년 9월 1일
키키 드림
[참고자료]
- 홍혜진, 2010.03.11, 중앙일보, 유괴 청소년 10명 중 9명이 여자…여섯 명은 성폭행·성매매 당해,
https://www.joongang.co.kr/article/4054790#home
- 이종호, 2021.10.23, 뉴스데일리, 주거침입 범죄 증가하는데 검거율 감소, 여성 1인 가구 두려움에 떨고 있다, https://www.newsdaily.kr/news/articleView.html?idxno=21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