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 관한 이야기(2)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네 번째 주제는 ‘언니’입니다.
안녕하세요, 키키.
이번 편지는 어떤 인사로 시작할지 주저하는 마음이 큽니다. 강연이 잘 끝나서 참 다행이라고, 가을이 완연한데 단풍 구경은 다녀왔냐고, 그런 심심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데 잘되지 않네요. 그냥 묻고 싶었어요. 키키는 괜찮은지, 10월 29일 밤 이후의 날들이 힘들지 않았는지 말이에요.
저는 무난한 일상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쁘게 할 일들을 처리하고, 틈틈이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면서요. 사실은 구체적 근황이 잘 기억나지 않네요. 그저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 감각하면서, 무섭게 꿀떡꿀떡 넘어가는 하루를 어영부영 소화하면서 그렇게 지나오고 있습니다.
이 참사에 관해 제가 할 수 있는 비판과 분석, 주장들은 다른 자리로 미뤄 두고요. 이 자리에서는 당신에게 단편 소설 하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최은영 작가님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작품인데요. 주인공 ‘희원’이 대학교에서 만난 젊은 여성 강사님을 서술하며 흘러가는 이야기입니다.
희원이 ‘그녀’로 지칭되는 강사님의 수업을 들었던 시기는 스물일곱, 늦깎이 편입생으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때였는데요. 스스로를 ‘감정도 생각도 느낌도 자기만의 언어도 반격할 힘도 없는 인형’으로 인식해온 희원에게 그녀의 수업은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어요. 키키도 알고 있지 않나요. 정의할 수 없어 감내하고만 있던 어떤 감정들을 정확한 언어로 들려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가슴이 환해지는 경험에 대해서요. 그건 아마 메말랐다고 굳게 믿은 땅에서 물방울을 발견한 느낌과 닮아있을 거예요.
희원은 샘물을 파듯 절판된 그녀의 에세이를 서점에서 찾아 읽는데요. 거기서 그녀와 자신의 공통점을 알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용산에서 오래 살았고, 2009년 1월 20일의 참사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희원과 그녀는 참사가 있었던 새벽에 무엇을 했는지, 그 일이 어떻게 ‘상처’가 되었는지를 나눕니다.
“같은 시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책상에 앉아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해했다. 터놓고 말하면서 내가 괴로웠다, 내가 상처 입었다, 라고 말할 자격조차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렇지만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사실 그대로 내 마음에 남아있었다.”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희원은 상처를 품은 단단한 얼굴의 그녀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요. 계속 공부하고, 말하고, 쓰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인지 결말에서 희원은 그녀와 같은 강사가 되는데요. 하지만 끝내 그녀의 소식은 알지 못합니다. 비정규직 시간 강사이자 젊은 여성이었던 그녀는 앞서간 숱한 사람들처럼 사라져 버리죠.
슬픈 결말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녀를 빛처럼 좇아 따르고자 했던 희원은 이제 어둠 속에 홀로 놓여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다음 문단에서 ‘해피엔딩’의 단서를 읽어내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토록 조급하게 사람들을 몰아내고 건물을 부수었던 자리는 공터로 남아있었다. 내가 늦깎이 대학생에서 대학원생으로, 시간 강사로 나아가는 동안, 빛나던 젊은 강사였던 그녀가 더 이상 내가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동안에도 그곳은 여전히 빈터였다. 나는 이제 그곳을 피해 지나가지 않는다.”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나는 이제 그곳을 피해 지나가지 않는다. 이 문장에서 미세한 희망을 읽어냈다면 과한 미련일까요. 희원을 둘러싼 세계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폭력과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책임자 없는 구조로 남아있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희원의 시선은 변화한 거잖아요. 응시할 힘과 견딜 힘, 어쩌면 ‘반격할 힘’으로의 변화요. 그녀를 희미한 빛 삼아 좇는 동안 희원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나아간 건지도 몰라요. 폭력과 죽음과 상처. 그것을 기억하면서도 계속 살아왔으니까요.
거대한 슬픔 앞에서 잠잠히 무너져 내릴 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이 있다면 어둠을 더듬고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겠죠. 저에게는 ‘앞서가는 여성’들이 늘 그런 빛이 되어줬던 것 같아요. 무료하고 무력해도 꿋꿋이 자기 길을 가는 친구와 언니들이요. 키키도 이제 그중 한 사람이 되었네요. 키키는 제게 맛있는 식당에 해박한 언니고, 재능과 정과 용기로 무장한 언니고, 같이 있으면 왠지 괜찮아지는 기분을 주는 언니예요. 당신이 괜찮으면 나도 괜찮을 것 같고 당신이 다시 일어서면 나도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 ‘언니’라는 존재가 그런 거 아닐까요.
영화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은 중학생 은희에게 이런 말을 하죠.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신기하게 손가락은 움직여져.” 성수대교 붕괴 참사로 영지 선생님을 잃은 은희는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움직입니다. 아주 희미한 빛을 좇는 희원처럼, 다시 나아가 보려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이 긴긴 이야기를 통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우리도 손가락을 움직여보자는 거였어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우리는 걸어갈 수 있으니까요.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아주 희미한 빛을 믿으면서, 이 무력과 비참의 시대를 잘 지나가 봅시다. 그렇게 오늘도 꼭꼭 씹어 잘 소화시켜봐요, 우리.
2022.11.15. 사하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