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연 Jan 07. 2024

나의 때

 몸을 불리지 않아도 된다. 물 묻은 내 몸은 때수건의 가벼운 움직임에도 때가 잘 밀려나왔다. 엄마는 때 미는 맛 나는 몸뚱이라 했다. 그래서 항상 목욕탕에 가면 제일 먼저 자유를 얻었다. 엉엉 우는 언니 둘을 뒤로하고 나는 냉탕에 들어가 첨벙첨벙 물놀이를 했다. 대충이 어린 내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매 순간은 아니었다. 무관심이 좋았던 건 오직 목욕탕 한정이었다. 


 내 손으로 때를 밀어내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엄마는 언니의 몸을 매만지며 살살 묵은 때를 밀어준다. 인생도 그랬다. 손 타지 않아도 잘 자라는 나보다 아픈 손가락이라 불리는 언니에게 많은 눈길을 주었다. 그게 당연하다 여겼다. 내 맘 언저리 섭섭한 마음 쯤 뒤로 잠시 물려두어도 되겠거니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이제 가족의 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한다. 수많은 시도와 실패 끝에 멀어진다는 죄책에서 자유로워졌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무관심 덕에 쌓아올린 내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험난하다면 험난한, 고되다면 고된 때 묻은 삶이었다. 조심스레 묵은 때를 걷어내자 상처투성인 마음 속 뽀오얀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 길을 돌아왔을 뿐, 외로웠을 뿐, 틀리지 않았음을 이제야 명확히 안다. 홀로 서있던 길 위 나는 그리 위태롭지 않았다.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모여 자격증이 되고, 소중한 사람이 되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불행했던 삶 덕에 행복을 안다. 부족했기에 만족을 안다. 길 잃은 삶이었기에 경험을 안다. 상처가 있기에 새살의 차오름을 안다. 


 급하지 않아도 천천히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걸어간다. 두려움이 앞서던 이전과 다르다. 어떤 일이 주어져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삶을 강인하게 만든다. 나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나는 뽀오얀 새살 위 상처가 나는 것쯤 이제 아무렇지 않다. 아니, 사실 조금 무섭다. 그러나 상처 위 묵은 때를 걷어내면 새살이 돋을 거라는 걸 알기에 용기 낸다.


 목욕탕을 안간지 오래다. 혼자 가야하는 목욕탕은 때 미는 맛이 안 난다. 때 미는 대망의 하이라이트인 등 밀어줄 이가 없기에 발길을 끊었다. 근래 집에서 샤워를 하다 때수건으로 팔을 스윽 밀어보았다. 역시 때 미는 맛 나는 몸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온 몸 구석구석 열심히 묵은 때를 벗겨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등만 밀면 진짜 개운할 것 같은데’


 욕실 문을 열고 남편에게 등 좀 밀어 달라 외친다. 잠시 당황하는 듯 하더니 이내 때수건을 손에 끼우고 내 등을 밀어대기 시작한다. 빡빡 좀 밀어보라는 성화에도 아플까 못 밀겠다며 살살 여러 번이고 내 등을 문지른다. 남편 덕에 오랜만에 묵은 때를 벗겨낸 나는 개운하게 목욕을 마친다. 모락모락 연기 나는 몸을 책상위에 맡긴 채 따듯한 차 한 잔을 마신다. 바로 앞 소파에 앉은 남편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문득 생각한다. 


때가 왔다. 오늘 밤 탱글한 내 속살을 자랑할 때. 




작가의 이전글 사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