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뭉클 Oct 28. 2024

글쓰기와 사계절



_


그러니까, 딱 이맘때 즈음이었다.


2인분치 일을 혼자 해내느라 일에 지치다 못해 삶 자체에 허덕이던 가을, 열정과 의지로 뜨겁게 달군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에 어설프게 식어 내 모습은 공기 인형을 닮아있었다. 작년 10월 말로 기억하니 딱 이맘때가 된다. 당시의 나는 뭔가를 쓰겠다는 결심이나 자신을 탐구해 보겠다는 거창한 계획 따윈 없었지만 일종의 돌파구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이렇게는 아니다'라는 무모한 확신으로.


함성미라클글쓰기 1기를 거쳐 7기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브런치 연재를 시작했고, 마라톤에 나가 10km 메달을 땄고, 10대부터 최근까지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마음공부를 시작했고 글쓰기 전부터 시작했던 북큐레이션도 계속해나가고 있다. 최근엔 미뤄뒀던 프랑스어,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고 크로매틱 하모니카도 배우게 되면서 선생님과 오랜 인연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글쓰기는 내게서 변명을 거두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의사가 되게 하고, 목표를 성취하게 돕고, 원래 좋아하고 꾸준히 하던 일들도 지속시켰다. 좋아하는 것들을 더 좋아하게 만들고,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다시 고질병이 도졌다. 자기 검열. 리디아 데이비스를 읽고, '이게 글인지, 어디까지가 글인지'에 대한 자기 검열을 거두자고 특훈을 받아놓고 더 깊은 늪에 빠진 것이다. 글쓰기와 보낸 사계절이 무색할 만큼 깊은 병이었다. 예전에는 순수하게 나를 탐구하느라 그저 재밌기만 했던 글쓰기에 쓸데없는 자의식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공부와 앎, 삶을 살아가는 중에도 의식의 차원과 단계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이제 글쓰기라는 걸 제대로 시작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를 하면서 갖는 흔한 강박이 있다.


주제가 뚜렷해야 한다.

작가처럼(?) 써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너무 솔직하게, 많이 쓰면 안 된다.

.

.

.



아, 그런데 나는 글을 쓰면서 진짜 행복해진 것 아닐까? 그래서 새로운 단계의 행복에 적응하는 중 아닐까? 어느 주말, 엄마와 긴 대화를 하면서 나는 문학과 마음, 마음과 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시 워크숍의 영향으로 충동에 충실한 글, 경계를 허무는 글에 도전하려는 마음이 커졌던 것 같다. 지나치게 규범적인 사람은 동시에 그걸 몹시 깨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리디아 데이비스가 나의 그런 갈증을 더 키웠을지도.


사계절을 돌아, 다시 나로 돌아온 기분이다. 하지만 분명 1년 전의 나와는 확연히 다르고. 다시 쓰고 싶어졌다. 사랑은 사랑이 끝난 후에 알게 되고, 어떤 삶에 대해선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새롭게 해석되는 것처럼, 지금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달라진 내가 있으니 그걸 그냥 종이에 옮겨 적으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마음, 오직 그것만이 글쓰기를 위한 준비물이다.



추신: 가을 하늘은 아주 높고 거대해서 우주를 구경하는 기분이다. 놓치지 말기를. 자주 볼 수록 내가 작아지고 그래서 맑은 마음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원한 오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